한국일보

형은 다르다

2013-06-2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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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하는 삶

나의 청춘은 소위 광화문 뒷길, ‘재수로’라 불리는 대입 학원 골목에서 막을 열었다. 교복은 벗었으나 아직 대학에 적을 두지 못한 재수생, 아무데도 소속된 데가 없는 인간.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자유스러워야 마땅하겠으나 당시에는 누구 앞에 버젓이 나서지 못하는 불쌍한 부자유인 신세였다.

나는 아침마다 겨드랑이에 책가방을 끼고 우중충하게 어깨를 구부린 채 재수로로 출근을 했다. 그 길에 가면 비로소 내가 속한 또 하나의 작은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집에서 타낸 학원비를 슬쩍 떼어서 부모님 몰래 온갖 잡기를 즐겼다. 아침에는 참고서를 산다고, 저녁에는 점심값이라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씀을 드리면 막내를 향한 측은지심에 부모님은 넉넉히 용돈을 내주셨다. 주머니가 불어난 철딱서니가 없는 재수생은 일대의 오락거리들을 찾아다녔는데 뭐니 뭐니 해도 이때 배운 당구가 6개월 만에 300이 되었다. 눈을 감으면 수학 2의 정석, 영문 해석 1,200제 같은 수험생 필독서 대신 희고 붉은 당구알이 어른거렸다.

하루는 가련한 아들에게 맛난 것이라도 사주실까 하여 찾아오신 어머니께 학원 수위 아저씨가 날름 대답했다. “아니 김범수 학생을 왜 여기서 찾으십니까? 요 앞 당구장에 가보시지요!” 그날 밤 어머니는 무릎 꿇은 아들을 향해 푸욱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니 형은 다르다!”나보다 열 살이나 위인 형은 과연 달랐다. 공부 잘하고, 교회생활에 흔들림 없고, 언행이 바르고 성실하며 부모님을 걱정시켜 드린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는 모범생. 형님은 학위를 마친 뒤 은행에 들어가서 평생 은행가로 일했다. 맏아들로서 성심껏 부모님을 모셨고 이년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에는 집안의 대소사도 모두 형님이 맡아 처리했다. 형님에게는 ‘나’보다 ‘김씨 가문’이 먼저였고 항상 형제자매들의 형편을 살폈다.


그런 형님 부부가 십년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유학시절, 그리고 지점장 근무시절을 지낸 캘리포니아가 그리워도 연로하신 어머님이 “가지 말라우. 너 없는 동안 나 또 아프면 어쩌간?” 하고 붙드시면 두 말 없이 주저앉아 미국행을 포기했다. 십년 터울의 형. 내가 초등학교 코흘리개였을 때 이미 대학을 갔을 테고 막내 동생이 재수로에서 담배를 물고 당구장 큐를 잡았을 때, 유학을 와 있던 형이 영어 원서를 읽느라 밤을 새야 했던들 나는 내 청춘만 소중했을 뿐 형에게 마음을 써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형을 보니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만난 듯 반갑고 위로가 된다. 못 보던 사이 형님의 흰 머리카락이 늘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느라 저녁상이 식어도 좋았다. 저녁이면 평생 교회에서 산 형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장남과 막내, 두 남자는 테너와 베이스로 화음을 넣어가며 찬송가책을 펴놓고 불렀다.

내가 자란 60, 70년대 소설이나 만화책 주인공 형제들은 우애가 좋았다. 가난한 형편에 도시락을 싸 보내지 못해도 형은 어렵게 구한 주먹밥 한쪽을 동생 교실로 가져다주고 자기는 주린 배를 수도꼭지 물로 달랬다. 요즘 애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오우! 학교에서 프리 런치가 안 나오나 봐요?’ 하고 김을 뺀다.

형들은 다르다. 남을 먼저 보살피는 눈과 마음 폭이 막내들보다 크고 넓다. 사랑은 물처럼 아래로 흐른다. 나를 키운 이 세상 형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김 범 수<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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