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모자라서 애들한테 배운다

2013-06-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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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얼마나 모자라면 애들한테 배우겠나’ 이 표제가 재미있다. 이것은 어느 유명 여배우가 새로 맡은 배역에 대한 독설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일까?

어쩌다 방송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퍽 재미있었어요” 어느 청취자의 말이 뜻밖이었다. 그날 마주 앉은 아나운서가 ‘그렇게 오랜 세월, 페스탈로치처럼 어린이들을 가르치신 분’이라고 소개를 하자 “아니에요. 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배웠어요. 그것을 크게 말하면 부모들이 등록금 내라고 할 테니까 작은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지만.”이라고 대답한 부분이 재미있었다고 한다. 청취자에게 재미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솔직한 필자의 심정을 말했을 뿐이다.


“선생님, 나 아빠 보고 싶어요” 여섯 살 여자 어린이가 말한다. 오늘은 아빠가 그 애를 학교에 데리고 오셨는데,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아직도 아빠가 대기실에 계신 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교실로 되돌아 온 그 애는 신이 나서 공부하였다. 여섯 살의 아빠 사랑이다. “네가 빨리 버스에 올라타고 좋은 자리에 앉아라” 그 말을 들은 어린이가 묻는다. “그럼, 나쁜 자리에는 누가 앉아요?” 말문이 막힌 어른이 중얼거린다. “누군가가 앉겠지. 그러면 너는 좋은 생각이 있니?” “엄마, 모두 차례로 앉으면 되어요?

“좋은 친구하고 놀아라” 아빠의 부탁을 받고 어린이가 묻는다. “아빠, 나쁜 애는 누구하고 놀아요?” “그럼, 너는 좋은 생각이 있느냐?” 어린이가 주저 없이 말한다. “누구하고나 놀면 되지요.” “나쁜 친구하고도?” “아빠, 나 장난할 때는 나쁜 짓도 하는데...” 아빠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로 옳다고 어른들이 다툰다. 그것을 바라보는 어린이들이 말한다 “어른들은 가위, 바위, 보를 할 줄 모르나봐” “너희들도 가끔 싸우면서 뭘 그래” “그렇지만 우리는 금세 같이 놀아요. 아니면 가위, 바위, 보를 해요?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해결 방법일 것이다.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같이 생명을 걸고 다툴 일은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어린이들의 문제 해결 방법이 단순하고 간단한 것 같다.
어른들은 어린이만 보면 무엇인가 가르쳐주고 싶어 한다. 그게 어른이 할 일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가. 그래서 등교하는 자녀들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무 열심히 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오늘도 신나게 재미있게 지내라” “오늘은 얼마나 재미있었니?” 이런 말들도 있는데 잠깐 잊어버리는가.

어른이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주로 지혜와 지식일 것이다. 인생 역정에서 쌓인 지혜나, 배우고 연구하여 알게 된 내용이나 범위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려고 시시때때로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어른에게 주는 교훈이 때로는 더 무게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인간다움이고, 사람다운 품성이기 때문이다. “그까짓 벌레를 왜 오래 들여다보고 있느냐?” “아니에요, 벌레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요” “엄마, 저 강아지 다리를 다쳤나 봐. 다리를 절뚝거려요” 어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보인다. “아빠, 나 돈이 필요해요” “왜?” “저기 앉아있는 가엾은 사람에게 주고 싶어요” 어느 틈에 어른들에게는 사라져가는 마음을 되살려주는 어린이들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배운다. 그것은 인간미, 사람다운 품성이고, 단순함이고, 솔직함이고, 사심이나 악의가 없는 마음이다. 본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지만, 복잡한 일상생활에서 그것들을 잃었지만, 어린들이 우리들의 착한 마음을 되살려 준다.
그러니 ‘얼마나 모자라면 애들한테 배우겠나’가 아니고 ‘정말 모자라서 애들한테 배운다’는 말이 옳을 듯하다. 이 말에 거부감을 느끼면 ‘어린이는 어른에게 배우고, 어른은 어린이에게 배운다’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주는 것이 근본적인 것이고 무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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