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섬기는 삶을‘꿈’꾸어라

2013-06-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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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삶이 좋은 건 어쩌면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꿈은 매순간 꾸어지지 않는다. 시작을 앞두고 가슴 두근거리며 마음속 염원과 함께 영글어가는 꽃망울 같은 것이어서 일까. 보일 것 같고, 만져질 것도 같지만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꿈’이다. 그래서 꿈은 항상 아름답고 그립다.

내가 교회와 하느님을 알기 훨씬 전부터 신앙은 나에게 그처럼 ‘꿈’이 되어 찾아왔다.

어렸을 적 학교 오가는 길목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교회가 있었다. 조그맣고 아담한 이층 벽돌건물에 하얀 십자가가 높이 걸려 있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무척이나 신비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비록 그 당시엔 ‘임마누엘’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지만, 하얀 십자가와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뿌려진 ‘꿈’의 씨앗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정보기술이 지배하는 ‘사이버 커뮤니티’다. 국가 단위의 국경을 초월해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이 자유로 자기공간을 만들어가는 신대륙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터넷은 온 세계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역사상 그 어떤 제국도 이처럼 큰 영토와 인구를 지배한 적이 없는 초대형 제국이 건설되고 있다. 이 같은 ‘net power’의 위력은 일찍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예견한 대로, 일대 패러다임의 이동을 가져오고 있다.

옛날에는 초롱불만 켜고도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지금은 대낮처럼 불을 밝혀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만큼 세상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도 한 가지 큰 희망은 한정된 물질은 나누면 작아지지만, 정보는 나눌수록 더 커가고 불어가는 특성을 지닌다. 물질이 지배하던 지난 세기 ‘경쟁’의 산업화 시대와 달리 정보화 시대인 지금은 그래서 ‘협력’과 ‘상호공존’의 세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상호공존의 다원화 사회인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 새로운 ‘꿈’이 필요한 때다.

보통 사람들은 어둠을 밝히는 ‘빛’의 모습은 좋아하지만, 빛을 내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태워야 하는 헌신은 회피한다. 하나의 작은 촛불도 알고 보면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의 눈물로 녹아내릴 때만 가능하게 되어 있는 데도 말이다. ‘협력’과 ‘상호공존’이 요구되는 21세기 다원화 시대의 꿈은 그래서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의 삶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음속으로부터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으면, 결단코 다른 이와의 협력을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섬김의 자세가 바로 ‘하느님’다운 삶이다. 세상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남의 섬김을 받을 수 있을까 궁리하지만, 하느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것만 봐도 분명해 진다. 그 때문에 세상의 ‘빛’이 된다는 말은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는 삐까번쩍한 모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섬김’의 삶을 말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섬기는 삶은 믿는 이들에겐 도전적인 새로운 ‘꿈’이 아닐 수 없다는 말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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