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권문제 철저한 인식을

2013-06-10 (월)
크게 작게
최효섭 (아동문학가 / 목사)

요즘 뉴스 가운데 탈북청소년 9인의 이야기만큼 가슴 아픈 소식은 없었다. 생명을 건 그들의 모험과 전진이 먹고 살아남기 위한 단순한 몸부림이었다는 점에서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한국 사람뿐이 아니라 이 스토리를 읽는 전 세계가 쇼크를 받았을 것이다. 생존은 인간의 기초적인 권리이며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 인권사상이고 정치여야 한다. 인간의 권리(인권) 문제는 주의와 사상을 앞선다.
인간의 가치는 생산성에 선행한다. 쓸모가 있으면 가치 있는 인간이고 쓸모가 없으면 죽여도 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중도(重度) 정신박약자들을 소모적 인간으로 규정하고 대량 학살한 사실은 정도(正道)를 벗어난 죄악이었다. 생명의 존엄(尊嚴)은 쓸모 이전의 문제이다.

존귀한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종이나 정권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기업주(企業主)의 생산수단이나 경제 발전의 도구 이상의 귀중한 생명체이다. 불치의 환자나 생산성이 적은 장애자나 노인들도 완전한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핵 찌꺼기나 화학약품 찌꺼기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복지사회란 생명을 귀중히 여기며 아끼고 그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히 여기는 사회이다.


생명은 도전이다; 정면으로 대결하라. 생명은 모험이다; 용감하게 그 바다로 출범하라. 생명은 의무이다; 참고 그 짐을 지라. 생명은 신비이다; 그 신비를 풀도록 사색하고 연구하라. 생명은 기회이다; 사라지기 전에 충분히 사용하라. 생명은 아름답다; 마음껏 찬미하라.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감사함으로 사용하라.

예수는 이렇다 할 성취를 보여주지 않았다. 역사에 남을 만한 저서도 활동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남겼다. 십자가는 바로 생명 사랑의 흔적이었다. 이 귀중한 생명은 시간과도 바꿀 수 없다. 하나의 생명을 위하여 평생이 걸릴지라도 어쩔 수 없다. 생명은 안락과도 바꿀 수 없다. 편하게 살았다는 것이 잘 산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가복음 8:36)

알찬 사람이란 내용이 풍부한 인간이다. 겉은 평범할수록 좋고 속은 알찰수록 좋다. 속은 비어있고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것은 허풍(虛風), 들어있는 것도 많으나 광고도 많이 하는 것은 속수(俗手), 알차고 평범한 것은 실력이다. 말과 행동은 평범하지만 그 속에 진실과 실력이 들어있는 인간 앞에서는 고개가 숙이어진다.

1963년 3월 8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워싱턴 대행진에서 연설하였다. “나는 꿈을 갖는다. 언젠가는 미시시피 주까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리라고, 남부 앨라배마 주에서도 검고 흰 아이들의 손이 정답게 뭉쳐지리라고 나는 꿈을 갖는다.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꿈만 놓치지 않는다면 미국 내에 꽉 차있는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심포니로 병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평등한 인권에 대한 꿈을 품는 자는 삶에 박력이 있다.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세상에서 생명을 구출할 용기가 있다.

나는 ‘2등에 머문 사람’이란 기도문을 적어보았다. “보다 더 훌륭해지려 하였으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 보다 고상하게 살려 하였으나 빛을 내지 못하고 만 사람, 급한 성격을 누르려하였으나 결국 생긴 대로 살고 만 사람, 그다지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았고, 그다지 높은 자리에도 앉지 못했고, 그다지 선인(善人)도 못되었던 그런 이들에게 복을 주소서. 1등 아님에 낙심치 않게 하시고 2등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소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