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용궁에서 바라 본 세상 풍경

2013-05-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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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구(공연예술가)

판소리 ‘수궁가’의 한 대목이다.
용왕이 자신의 병을 고칠 토끼 간을 구할려고 수국 대신들을 전부 모았는데, 자신이 이럴 때는 “용왕이 아니라 팔월 대목 장날 생선전의 도물주”가 되었다고 탄식한다. 그도 그런 것이 거북이, 도미, 민어, 오징어, 도루묵, 조개, 방개, 청다리, 낙지, 모래무지, 방개 등 온갖 수국 물고기들이 다 모였기 때문이다. 그중 진양장단으로 세월네 네월네 엉금엉금 기어 왔던 별주부가 용왕 앞에 아뢰기를, 자신을 육지로 내 보내 토끼 간을 구해 오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용왕이 되 묻기를 “네 충성은 지극하나, 세상에 나가면 인간의 진미가 되어 왕배탕(자라탕)으로 죽는다니, 그 아니 원통허냐?”별 주부 아뢰기를 “소신은 수족이 너이오라, 강위에 둥실 높이 떠 망보기를 잘하와 인간에게 당하는 일은 없으나, 물에서 태어난 고로 토끼 얼굴을 모르오니 화상 하나만 그려 주시면 꼭 잡아다 바치겠습니다.”별주부 명을 받고 뭍으로 나서기 전, 늙은 모친에게 나랏 일로 가는 것이니 근심치 말라 위로하고, 마누라에게 들러서는 재너머 남생이란 놈 행동이 껄쩍지근 하다며 “그놈 몸에서는 노랑내가 나고, 내 몸에서는 고소한 내가 난게 조심 허렸다” 하고 제 마누라 단속도 잊지 않는다.

이야기 속의 별주부는 토끼 간을 구해 가지 못했다. 그런데 사설과 가사를 조곤조곤 들어 보니 대통령 방미 길에 사고를 친 어느 벼슬아치의 행태와 비교 된다.
실패한 임무였으나 죽음을 각오 하고 충성하겠다던 별주부의 의지는 대견하고, “수수천년이 되어서 삶아 놔도 먹지 못할 자라” 노모를 위하는 마음은 기특하고, 제 마누라 바람 날까 은근 마음쓰는 꽁생원 기질 마저도 귀엽기만 하다.
난생처음 뭍에 나와 온갖 산짐승과 세상풍경을 바라 보던 별주부는 오죽이나 문화충격이 있었겠는가? 2시간 넘는 완창 ‘수궁가’에는 나랏 일 하던 별주부가 술마시고 암짐승 허리(?)를 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인간 세상이 ‘8월 대목 장날 생선전’ 만도 못한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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