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성추행 참사 빚어낸 갑을 관계

2013-05-16 (목)
크게 작게
천지훈(사회1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가 가져온 후폭풍이 거세다. 지난 한 주 동안 한·미 양국을 들었다 놓고 있다. 바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사건 때문이다.
양국의 주요매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관련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하나 빠져 있다. 바로 재외공관 인턴처우에 관한 사실이다.

피해 인턴 여성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해 모든 언론들이 촉각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대한민국 국가 원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고위공직자가 벌인 추행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이같은 보도 행태 때문인지 독자들도 ‘누가’, ‘누구를’,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서만 흥미를 쏟고 있다. 아무도 ‘왜’ 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왜 벌어진 것일까. 물론 가장 큰 원인은 가해자의 인성 문제일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이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변인은 일종의 상·하 관계를 이용해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고위 공직자인 가해자의 말을 재외공관 인턴에 불과한 피해자는 쉽게 거부할 수 없었다는 암묵적인 논리가 이번 사건 깊숙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소위 요즘말로 ‘갑’과 ‘을’의 관계인 것이다.

‘인턴’이란 단어가 갖는 사전적 의미는 회사나 기관 따위의 정식 구성원이 되기에 앞서 훈련을 받는 사람 또는 그 과정을 뜻한다. 재외공관의 경우도 ‘대통령 방문’이나 ‘재외선거’와 같이 한국의 주요행사를 공관에서 실시될 때 행사진행 인원을 임시 보충하기 위해 인턴을 채용하곤 한다.

보통 이런 경우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젊은 인력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로 한인 1.5세, 2세들이나 유학생들이 많이 지원한다. 모국의 행사에 스스로 참여해 경험을 늘리는 한편 한국인으로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이유일 것이다. 때문에 재외공관 인턴직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봉사직에 가깝다.
그러나 공관 인턴으로 참여했던 많은 젊은 한인남녀들 중에는 보람보다는 오히려 실망감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상당하다.

2011년 대통령 방미당시 공관에서 인턴경험을 했던 A씨는 “솔직히 경력을 떠나 나라의 큰 행사의 일원으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잡일하는 일꾼 취급받기가 일쑤였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이 새벽부터 대기하다 호출이라도 하면 밤낮없이 뛰어나가곤 했다”며 당시 자신을 종 부리듯 하던 한국 공직자들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고 전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사건은 언젠가 터질 일 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한국에 만연해 있는 잘못된 ‘갑을 관계 문화’가 이 같은 추악한 사태를 빚어낸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 가 묻고 싶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