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 1세라는 이름의 부모들

2013-05-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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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긴 겨울이 지나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따스한 봄이 오면 세상은 성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다를 바 없다. 아름다운 곳이 지구이고 내가 사는 곳이다. 참 좋다. 더욱이 인적이 드물면 들판의 풍경도 더욱 아름답고 산천의 모습도 더욱 신비스럽다. 집을 나서보면 정말로 참 좋다. 자연은 걱정거리가 없어 좋고 시달리지 않아 좋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으니 참 좋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모이면 이 아름다운 지구에게 폐를 끼친다. 아니 상처를 준다. 갈등이 심한 이민 생활에서는 풀 수 없는 갈등의 화가 아름다운 자연을 팽개치기 일쑤이고 심하면 말없이 아름다움만 보여주는 산천에 상처를 준다. 무관심이다. 무관심이란 상처인 것이다.


사실 이민 1세들은 아무리 세상이 아름다워도 갈 곳이 없다. 빈손으로 발을 디딘 타국에서 처자식을 데리고 우선 먹고 살아야 한다고 어깨살이 발바닥이 되도록 일만하는 동안 “나”라는 존재는 다 잃어 버렸고 그 잃어버림 속에서 2세들은 아무런 불편 없이 자랐고 이민 1세들의 존재는 의례 그런 존재라고 무의식으로 굳어버렸다.

무거운 짐을 싣고 산언덕을 넘는 말은 세계 어디를 가나 준말이 아니라 노새들이다. 말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는 말, 노새! 노새는 언제나 무거운 짐을 등에 얹고 산을 넘는다.

노새였던 이민 1세! 고개를 다 넘고 좀 쉬어 보려니 노새는 휴식이란 단어를 찾을 길 없이 다 잃어 버렸고 있어도 어색하기 그지없다.나이 든 노새는 자기가 누구이고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경사진 고개를 힘들게 넘었는지 그 까닭조차 다 잃어버렸다. 고개를 다 넘고 짐을 푼 후 아름다운 세상이 뒤늦게 눈앞에 다가와 어디 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갈 곳이 없다.

가족을 책임지고 부양해야 한다는 습관적 관념에 충실하는 동안 가족들은 뿔뿔이 극단적인 개체의 개인적으로 자랐다. 형제가 형제가 아니고 부모자식이 부모자식의 관계가 아니고 부부의 관계가 변질되어 가족이란 이름은 다만 명목상의 문패일 뿐 이민 1세의 노새들이 경사진 고개를 넘으며 생각하던 진짜의 가족관계는 아니었다. 그걸 우리는 세대의 차이와 시대의 변화라고 머리를 끄덕이며 억지로라도 인정하려 들지만 가난했을 때의 행복은 가정경제의 부흥이 무너뜨리고, 가난했을 때의 존경은 가정경제의 안락이 다 빼앗아 갔다.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식들이 부모는 짐이라고 피해간다.

한국의 밀폐된 역사적 공간에서 살아 온 이민 1세들의 강요된 의무는 노새의 역할이었다. 이민의 가치가 무엇이고, 이민의 가치를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이 땅에 주저앉은 사람들, 이민에 대한 한마디의 의견도 없이 무작정 뛰어든 이민 1세들의 결과는 무거운 등짐을 진 노새의 역할뿐이었다. 소금장수 아비가 소금을 아껴야 한다고 탈진에 쓰러지고, 한 병의 물을 아껴 팔아야 한다고 탈수로 죽어가는 물장수아비들이 이민 1세들이었다.

왜 그러했는지를 가늠하지 못하는 아들은 새 신발을 사서 신고서도 불평이 심했는데 아비는 아들이 신던 헌 신발을 아무도 모르게 주워 신고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 아비들이 나이가 드니 가치관의 변화인지 시대의 변화인지 세대의 가치관 변화인지 이민 1세의 아비들은 갈 곳이 없다. 많은 자식들이 이민1세라고 불리는 노새의 부모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싫다. 싫어! 거꾸로 돌아갈 수 없는 종착역 가까이 와서 돌아보니 싫다. 싫어!
나이에 동댕이쳐진 육신이 싫고, 관념의 차이에서 뒤떨어진 정신이 싫고, 길을 걸어도 땅 거죽을 보며 뒤떨어져 걸어야 하는 이민 1세란 세대가 싫다.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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