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는 왜 날아야 하는가

2013-04-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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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 (목사)

아버지 송지호에서 쉬었다 가요./ 시베리아는 멀다./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시인 이상국씨의 대표시 ‘기러기가족’이다.

기러기 가족이 시베리아 송지호 가까이 날고 있었다. 시베리아 항로가 처음인 아들 기러기가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아버지의 대답은 단순했으나 의미는 심장했다. 이는 무슨 말인가. 바로 정체성을 말한다. 날개짓을 멈추는 순간 기러기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이 겪는 위기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이다. ”내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하여 이 자리에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존재인가”라는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사람은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추진력과 창의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정체성의 위기를 만나면 영, 혼, 육을 하나로 묶는 통합능력이 흔들리고 매사에 자신감을 잃게 된다. 정체성은 곧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

인디안 소년이 산속에 들어갔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얻었다.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닭장 속에 넣었다. 암탉은 그것이 자기의 알 인줄 알고 함께 품었고, 얼마 후 그 안에서 독수리 새끼가 부화 되었다. 병아리와 함께 태어난 독수리 새끼는 자신이 병아리인 줄 알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풀섶을 뒤지며 벌레를 잡아먹고, 주둥이로 땅속을 뒤집어 지렁이를 잡아먹었다. 큰 날개가 돋아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아리처럼 종종 걸음을 치며 돌아다녔다. 정체성의 혼란이 온 것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어느 날이었다. 장엄한 모습을 한 큰 새가 하늘을 유유히 맴돌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 장엄한 새를 보자 말자 혼비백산하여 자취도 없이 숨어버렸다. 하지만 새끼 독수리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왠지 숨고 싶지 않았다. 시냇가 풀섶에 숨은 친구 오리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새들의 왕자인 독수리다!” 그때서야 새끼 독수리는 위대하고 장엄하게 생긴 그 새가 독수리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장엄한 독수리가 하루 종일 새끼 독수리를 응시하며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 독수리가 “나는 너의 아버지다. 네 모습을 자세히 보아라. 너는 병아리가 아니고 나와 같은 독수리다. 네 날개를 활짝 펴서 하늘 높이 올라오라.”고 부르는 듯하였다.

새끼 독수리는 날개를 활짝 펴 보았다. 자신의 날개도 하늘의 독수리와 같은 황금색이었다. 새끼 독수리는 두 다리로 땅을 힘차게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아버지 독수리가 날아와 그를 데리고 깊은 숲속으로 날아갔다. 정체성이 회복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우리 주변에는 병아리 같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독수리가 의외로 많다. 왜 높은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아들 기러기 같은 인생도 많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만나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정체성이 회복되고 인생이 새롭게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저 아래를 얻기 위해 높이 날아야 할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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