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어디서 살아?

2013-04-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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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지난 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고은 시인이 이태리 북부의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서있는 사진을 보았다. 오른쪽으로 300여년 역사를 지닌 유럽 최초의 카페 플로리안 입구가 보이고 뒤로는 산마르코 대성당의 망루가 보이는 광장에 노시인은 왜 서있을까 궁금했다.

고은 시인은 베네치아 카포스카리 대학 총장으로부터 명예 펠로를 받고 4개월간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이태리 각 도시와 프랑스 등에서 문학 초청강연을 한다고 한다.
12년째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고은 시인은 문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통일 활동으로 이름 높은 민족시인이다.


한때 찬란한 역사를 지닌 고택이 물에 잠겨가는 슬픈 도시 베네치아에서 시인은 “조국에서 사는 것보다 거울에 비춰진 조국을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11월 전북오페라단이 무대에 올린 자신의 대표작 ‘만인보’를 보러간 군산의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조국이 통일만 되면 내 나라를 떠나 민족을 잊고 싶다. 지긋지긋하다. 조속히 분단이 끝나길 바란다”
반세기이상 계속되는 분단에 대해 얼마나 화가 나고 통일 염원이 컸으면 그렇게 역설적으로 말했을 까.

최근 들어 TV만 틀면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의 상황을 보도하는 미국이나 한국 뉴스들이 지겹다 못해 “당분간 한국을 잊고 싶다”는 한 친구의 말에 차라리 “민족을 잊고 싶다”는 시인의 그 말이 실감난다.

북한은 연일 핵무기를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정전협정 무효화 선언, 개성공단 잠정조업중단 등을 시행했고 단추만 누르면 미사일이 날아간다면서 전쟁 준비가 다 되었음을 공포했다. 이에 한국의 국제행사가 취소되고 관광객이 줄어들었으며 미주한인들은 가족, 친지 걱정에 한국에 전화를 하기도 했다.

마치 청,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외압 속에 백척간두 신세였던 19세기 조선의 운명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관심이 뜨겁다.
평생 모국어로 시를 써 온 시인이나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은 단 하루도 두고 온 조국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을 것이다.

일부 미주한인들은 매일 핵무기, 분단, 비상사태 등등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한국 땅을 멀리 떠나와 미국에 사는 것이 속 편하지 하는 생각도 일순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땅이라고 안전할 까, 15일 보스턴 마라톤대회 결승선 근처에서 테러로 추정되는 폭탄폭발 사고가 발생, 무고한 시민들이 죽고 부상을 입었으며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7일에는 텍사스의 비료공장이 폭발하여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오바마 대통령과 상원의원에게 보내진 우편물에서는 독극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2년 전 9.11 참사를 겪은 뉴욕은 곧장 비상사태에 돌입하여 공항, 뮤지엄, 지하철 보안 및 검색이 강화되었다.

걸핏하면 테러 위협으로 인해공황 상태에 빠지는 대도시가 지겨워 타주로 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난 해 12월 커네티컷의 참혹한 총기 난사사고가 발생한 뉴 타운은 조용한 시골마을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피신할 데도, 갈 곳도 없다. 시간과 장소 불문하고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가 터지는 세상에서 우린 어디서 살아야 하나?당분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극장, 뮤지엄, 샤핑몰 등 공공장소에 가지 말고 조심하라고 하면 우리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꽃피는 봄에는 브롱스 식물원에 가서 오키드 쇼를 보고 샤핑몰에 가서 아이 샤핑도 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밥 같이 먹으며 하하호호 수다도 떨어가면서, 그렇게 지극히 평범하고 평온한 일상을 누리며 늙어가는 것, 이 소박한 삶의 재미를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다.한국, 미국, 베네치아뿐 아니라 중동지방이나 아프리카 어디에 살든 인간은 공포와 위협,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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