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회평론과 설교의 위기

2013-04-13 (토)
크게 작게
김근영(목사)
독일의 신학자 칼 마르트는 ‘한 손엔 신문, 다른 한 손엔 성경을 들고 설교하라’고 하였다. 평론이란 옳고 그름, 아름답고 추함을 구분하는 학문이다. 문학평론, 음악평론, 사회평론 등 이미 우리 귀에 익숙해진 말이다. 평론은 역사의 진보를 위한 한 방편으로 민주주의가 만든 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제주의 때에도 평론이 있었는데 특히 사회평론분야는 구약시대의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의 몫이었고, 세례요한과 예수를 이어 중세 개혁자들로 맥을 이어갔다. 사회평론의 한 방법으로는 언론 즉, 설교란 메시지로 사회학의 모순에 접근하였고 치유(healing)하였다. 1970년대부터 ‘설교의 위기’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설교의 위기’가 그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히틀러 정권에 동조했던 독일 기독교나 일제 신사참배에 합류했던 조선기독교도 한때 설교의 위기를 겪으며 외도의 길을 걸었다.

한국교회의 설교사를 요약하면 일제의 침략과 1950년대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위로와 회생이 설교되어졌고 1970년대는 잘살아 보자는 희망과 가능성을 설교했다면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고장 난 나침판처럼 방향감각을 잃은 채 세속과 야합하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설교가 황금만능주의와 출세욕의 시녀노릇을 하며 마치 군중들을 의식한 채 책임회피하며 손을 씻고 있는 빌라도를 연상케 하였다. 또 설교자들은 무대병에 감염되어 인기위주, 물질축복, 우상설교가 은혜스런 설교로 둔갑하게 되었다. 설교자들이 ‘복음과 성령’을 설득 시킬 수 없으니 자연히 청중들은 믿음보다는 율동과 감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신앙으로 오인하는 영적 굶주림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구원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하여 선한행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예수의 산상수훈의 선행을 불식한 괘변을 설교하여 그것이 오늘날 사회의 도덕불감증으로 연결되고 있다.

역사 이래 몰락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말기현상은 한결같이 부정부패와 부도덕이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이스라엘 로마제국, 백제가 그랬다. BC627년전 예레미야가 소명 받을 때 유다도 그랬는데 우상숭배와 고위 공직자의 뇌물스캔들, 성도덕 문란 등이 요즘 한국사회처럼 극에 달하였을 때, 예레미야는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지는 끓는 가마(렘1:13)의 환상을 보면서 서툰 화술로 범죄한 조국 유다를 향해 눈물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 ‘예레미야 애가’이다. 메시지(message)와 마사지(massage)는 단어가 비슷하지만 그 뜻은 완전히 틀린다. 우리가 하는 설교가 신의 뜻을 전하는 메시지인가? 아니면 인간의 뜻만 충족시키려는 마사지인가에 따라 ‘설교의 위기’여부를 진단할 수 있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