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월의 봄

2013-04-05 (금)
크게 작게
민병임(논설위원)
원래 4월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우절로 시작되는 4월은 속이 텅 빈 공갈빵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4월은 젊은 나이였기에 세상이 시시했고 누군가 떠나갔고 감정이 복받치는 일들이 자주 있었다. 으스스한 날씨에 황사까지 날려 눈앞이 늘 부옇고 바람이 불면서 먼지나 티끌이 눈으로 들어오던 기억, 그래서 눈물 난 기억이 난다.
뭔가 될 듯하면서 되지 않는 봄이라 초조했고, 긴장했고, 그야말로 영국시인 T.S. 엘리엇의 싯귀처럼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었다.

시인이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시에서 ‘아,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에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일깨운다‘고 표현, 그 시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시가 되었고 이후 전세계인이 자주 인용하고 있다.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시대적 환멸과 허무사상을 바탕으로 일상을 꾸려나가기 힘든 사람들의 삶을 묘사했다지만 작가 자신은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시에 불과 했다고 전한다. 아무튼 시인은 봄이 되어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모든 생명체의 고뇌를 잔인하다고 했다.
나 역시 여름이나 겨울처럼, 확실하게 더우려면 덥든가 왕창 추우려면 춥던가, 아니면 바바리코트 깃 세우고 코트 자락 날리면서 걷는 단풍든 산책길을 선사하는 가을처럼 무드가 있던가, 이래저래 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참으로 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늘 바빠서 미친 듯 펄럭이며 돌아가던 젊은 날이 지나고 중년에 접어들면서 집과 동네, 공원에서 피어나는 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홍색 매화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피어나고 뒤이어 나뭇가지 틈새에서 수줍게 고개 내미는 백목련과 자목련, 집앞 뜰에서는 노란 수선화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빨간 튤립, 보라색 다알리아, 새하얗거나 연분홍색의 벚꽃까지 하르르 바람에 날려 떨어지면 온 세상이 꽃천지로 피어났다.

베이사이드에 살 때는 30~40분이면 될 출근길을 복사꽃 피어난 골목과 좁은 도로로 50분이나 걸려 돌아가면서 온갖 꽃들을 구경했다. 연두, 초록, 노랑, 파랑, 연분홍, 진분홍, 연보라, 마치 파스텔통이 엎질러진 듯 자연이 뱉어내는 화사한 입김은 모든 생명체의 고뇌가 아니라 환희를 느끼게 했다. 움트고 싹이 자라 꽃 피우는 봄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피어오르는 ‘생명의 달’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봄이 사계절 중 가장 좋다. 겨우내 움츠린 것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평소 바라던 것을 이룰 것 같고 좋은 일이 생길 것도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좋아하는 계절이 바뀌듯 사람의 마음도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계절이야 가을에서 봄이 되면 어떻고, 여름에서 겨울이 되면 어떠랴.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않으니 상관없다.

좋고 싫고 하는 사람의 성향이나 마음은 변할 수 있지만 인간의 기본인 정직, 양심, 신념, 지조, 가치관은 변해서 안된다. 지식인이나 위정자의 가치관이 바뀌면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흔들리고 역사가 바뀐다. 의욕과잉 또는 일관성 없는 정책, 하루아침에 뒤집는 타협 같은, 원칙 없는 사회가 국민들을 서럽고 배고프게 한다. 지조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그 같은 지도자는 국민도 따를 수가 없다.

비단 미국과 한국의 정계뿐 아니라 미주한인사회도 다를 것이 없다.
한인들이 많이 하는 자영업 중 신발가게를 하다가 리커 스토어를 열고, 세탁소를 하다가 네일살롱으로 전업하고 커피샵을 하다가 델리를 하는 업종 전환을 두고는 ‘지조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좀더 이문을 남기기 위해, 원래 하고 싶던 장사라 등등 명백한 비즈니스의 갈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장님 소리가 듣기 좋아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 단체장을 해서는 안된다. 한인사회 단체장을 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이다. 꽃피는 봄이 시작되면서 뉴욕한인회장, 평통회장, 기타 봉사단체장이 새로 바뀐다고 하니, 나름의 신념과 기개를 지니고 묵묵히 헌신하는 자를 기대해 본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