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에피소드 모음

2013-03-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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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한 시간 반의 이른 등교는 40년간의 철칙이다. 임차하고 있는 학교를 우리 사정에 맞게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 날도 예정된 일을 하고 있는데 젊은 남녀가 나타나 인사를 하였다.

내가 물끄러미 그들을 보자 남자 쪽이 “선생님, 저...” “아! 아무개네. 그런데 웬일로...” “오늘이 저희들 약혼식 날이에요. 그래서 내가 자란 학교를 스잔한테 꼭 보여주고 싶어서...” 필자는 그들을 껴안고 행복했다.


“오늘은 기념할 날이지요. 지난 토요일은 내가 뒷자리에 앉았어요. 오늘은 내가 앞자리에 앉아서 차를 운전하고 학교에 왔어요. 가끔 뒷자리의 엄마, 아빠가 웃었어요. 야! 신난다. 내가 컸어요. 이렇게.”

제대로 잠을 못 잤다. 흥분해서, 혹시 밤새 없어질까 봐. 어제저녁 어떤 학부모가 1만 달러를 현금으로 가져왔다. 그래서 그것을 은행에 입금하러 가는 길,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가끔 발걸음을 조절하였다. 이 금액은 사위될 사람이 처가에 선물로 가져온 것이란다. “이런 뜻있는 금액은, 뜻있게 쓰려고 학교에 기부합니다” 여기가 바로 이런 에피소드들이 모이는 학교이다.

서해안의 유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아들을 방문하려는 부모도 거의 40년 가까운 학교의 지인이다. “거기서 즐겁게 지내고 오겠습니다. 손자, 손녀하고...” “말이 잘 통하시나요?” “그럼요, 그 애들은 한국말로 키웠대요, 그 애들 엄마도 아빠처럼 여기 졸업생인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어느 토요일 아침, 커다란 카키색 주머니를 어깨에 멘 졸업생이 나타났다. “반갑다, 무엇을 잔뜩 넣었지?” “제가 쓰던 야구 도구 전부지요. 후배들한테 주고 싶어요.” 필자는 그의 손을 잡았다. 또 다른 어느 토요일 낯익은 남매가 산더미 같은 물건을 등에 메고, 수레를 끌고... 마치 이삿짐 같다. “집안을 정리하다가 여기서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이런 사실은 신문에 내야할 것 같다고 주위에서 떠들기 시작하자, 그들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들이 가져온 물건들은 훌륭한 전시실에 보관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들을 값지게 활용하는 것이, 남매에게 감사하는 방법이다.

얼마 있으면 세 살이 된다는 어린이, 그의 조부모와 엄마, 아빠 일행이 본교를 방문하였다. 그 목적은 어린이에게 부모가 자란 곳을 보이고, 어른들은 그 옛날을 더듬어 보기 위한 것이란다.

그런데 필자는 그 조부모를 잊을 수 없다. 본교 희망자 제1호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부모가 쓴 편지 사연은 이렇다. “우리 아들이 나이가 아직 모자라지만, 귀교에 다닐 수 있도록 특별 배려를 바랍니다.” 곧 교사회가 열려 이를 가결시켰다. 바로 그분들이 오신 것이다. “본교의 기틀을 잡아주신 분들 잘 기억하고 감사드립니다.” 이것일 필자의 인사말이었다.


결혼 청첩장이 자주 온다. 때로는 미국이름 뿐이어서 어리둥절 한다. 미술 전람회 청첩장도 가끔 온다.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 것이다. 그들이 옛 학교를 상기하면서 보내오는 반가운 소식들이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던지 묻지 않는다. 틀림없이 사회의 좋은 일꾼일 테니까. 다만 바라는 것은 본교 교육 특성이 그들의 생활 한 부분을 돕기 바란다. 그것이 바로 본교 존재 이유가 아닌가. 다만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옛 학생들을 곧 알아보지 못한다고 섭섭해 하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어린 학생들만 기억하는 옛 사람들이 놀랄 만큼, 혈기 왕성한 청년.장년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니까.

수없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져 학교 역사의 긴 띠를 이룬다. 에피소드 안팎의 주인공들은 지금이 에너지를 100% 발휘할 수 있는 전성기이다. 그들의 현명함과 끈기는 이 활약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란다. 그 끈기가 본교 재학 중 축적이 되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일까.

뒤돌아보면 본교 40년의 역사는 수없는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거쳐 간 길목이었고, 그 길을 다듬고 있던 관계자들은 오고 가는 그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노력한 것이다. 역사는 누가 만드나? 나라의 역사는 국민들이 만든다. 학교 역사는 학교와 관계있던 모든 사람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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