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장에 가다

2013-03-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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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하는 삶

▶ 김 범 수 <치과의사>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어렵다. 남들은 일 년에도 몇 번씩 한다는데… 십년 전, 너 나 없이 유행하던 효소다이어트를 시도했다가 삼일 만에 끊었다. 못 먹으니 기운이 없었고 기운이 없으니 누웠다. 누우니 잔다. 누가 뭘 물어도 대답하기도 귀찮다. 재미난 일을 보아도 우습지가 않았다. 배가 고프다. 화가 난다. 환자를 봐도 웃지도 않는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의사와 일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간호사들이“ 선생님, 다이어트 그만 하세요”라며 간곡히 말리기에 그날로 접었다.

심장 전문의가 날더러 고기 대신 야채를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아무 것도 못 먹게 하는 다이어트 보다는 그래도 낫지. 먹을 수 있는 야채와 못 먹는 야채 그룹을 나누어본다. 나는 오이를 못 먹는다. 오이는 음식이 아니라 여자들의 얼굴 마사지용품일 테니 도저히 못 먹는다. 흐물거리는 가지도 못 먹는다. 호박 역시 흐물흐물하다, 미역은 너무 미끄럽다. 밥 안에 든 콩은 씹을 때 걸리적거리고 상추는 싸서 먹기가 귀찮다.

서양 야채도 그렇다. 냄새 강한 실란트로와는 아직도 친해지지 못했고 앤다이브는 쓰다, 삶은 비트는 무슨 맛인지 모르게 접시 위에 피 같은 자국을 남겨서 무섭고 리크는 질긴 섬유질이 끝내 목으로 잘 안 넘어간다. 아스파라거스는 드레싱 맛뿐이고 브라컬리는 반드시 치아 사이에 낄 것이다. 파프리카는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맛이고 내가 말도 아닌데 당근은 너무 딱딱하지 않은가?


철이 덜 든 아이처럼 입맛으로 스포일되었다는 자각이 들면서 나는 요즘 야채를 구하러 파머스 마켓에 다닌다. 주일 아침 일찍이 할리웃 파머스 마켓에 가면 가로 세로 십자로 이어진 천막 가게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저마다 유기농 채소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싱싱한 샘플도 주고 자기네 농장 사진도 보여준다.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무공해 야채와 과일은 수퍼마켓에 진열된 상품처럼 반짝거리지 않고 오히려 못생기거나 흠집이 많다. 벌레 먹은 잎사귀도 그대로 내놓았다.

우리 동네에는 여기서 구입한 야채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진행 중인 ‘100마일 다이어트’도 바로 이같은 파머스 마켓을 이용하자는 로컬 푸드 캠페인의 일환이 될 것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100마일 반경 안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소비하자는 것이니 주일마다 시장에 나오는 나 같은 사람은 아주 착한 시민일까?

파머스 마켓에 다니면서 건방진 편식 성향은 이제 많이 고개를 숙인 것 같다. 시인들은 꽃 한 송이에 우주의 신비가 들어 있다지만 야채 한 포기에 들은 신비는 또 어떤가. 검붉은 색만 있는 줄 알았던 비트 뿌리 중에는 알록달록 무늬가 진 단면의 배색 디자인에 입이 벌어지는 것도 있다. 호박은 못생긴 엉덩이처럼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 모양, 오리 모양으로 예쁘게 잘도 자랐고 버섯의 종류는 길고 넓적하고 뚱뚱하고 주름지고… 수십 가지가 넘고 샐러드용 그린 믹스 안에는 소위 먹는 꽃이라 하여 주홍과 노랑, 보라의 색색깔 꽃들이 수줍게 섞여 있다. 감자는 까맣고 케일은 아름다운 부채꽃처럼 피었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파머스 마켓 좁은 골목을 걸을 때면 나는 즐비한 천막 사이로 얼핏 뚫린 하늘에서, 이것들을 만드신 누군가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재밌지?” 하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아 덩달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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