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시상식과 취임식

2013-02-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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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 <웨체스터 지국장>

30년 넘게 유일한 나의 엔터테인먼트는 아카데미 시상식 밤이다. 매년 이 맘때에는 이 한 밤을 위해 후보에 오른 영화를 보느라 바쁘다. 적어도 작품상, 감독상 그리고 주연 배우 후보에 오른 영화는 다 보고 내 나름대로 평가를 하며 심사를 해 두어야, 1년에 한번 일요일 밤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는 재미를 톡톡히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다음날이면 누가 무슨 상을 탔는지 다 알 수 있지만,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후보자들 중에서 과연 누가 뽑히는지 그 순간에 나의 눈과 나의 판단력을 가름해 보는 그 짜릿함은 아마도 스포츠 중계를 보는 마음과 비교가 될까?
한국에 살 때부터 익히 알던 이 시상식은 미국에 살기 시작하면서는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시청해 왔다. 어느 해는 구역예배와 겹쳐서, 남몰래 그 집 지하실에 가서 TV를 본 적도 있다. 주로 TV를 차지하고 있는 남편도 이 시간만큼은 나에게 양보를 한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밤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과 시간이 겹쳤다.
남편은 무조건 한국 TV보기를 좋아 한다. 미국 TV의 스포츠 프로그램 이외에는 한국 TV 틀면 나오는 모든 뉴스 프로그램과 아무 드라마서부터 하다못해 한국의 어느 고속도로 상황, 남해안 서해안 날씨, 시골 동네에 수도관이 터진 사건까지 한없이 본다. 이렇듯 한국 방송을 사랑하는 남편이 얼마나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실황을 보고 싶을까. 더구나 한국의 정치라면 목숨 거는 동포 남자 중에 한 분인데……나는 미리 갈등을 느꼈다.

저녁 식사 후에 슬슬 눈치를 살폈다. “여보, 박근혜 취임식 봐야지?” 먼저 선수를 쳤다. 반응이 생각보다 시시했다. “뭐, 안 봐도 돼.” 무슨 작전일까 좀 불안했다. 결국, 우리가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옛날 애들을 데리고 간 입체영화나 ‘터미네이터 2’같은 시끄러운 영화를 보면서도 잠을 자던 남편이 영화광 아내와 30년을 살면서 조금 바뀐 것인가. 게다가 올해는 나와 함께 ‘Lincoln’, ‘Zero Dark Thirty’ 그리고 ‘Argo’도 같이 봤으니, 조금은 영화에 관심이 생긴 것일까.

결국, 전반부는 커머셜 시간과 쇼 시간 마다 한국 대통령 취임식의 일부를 봤고, 아카데미상의 중요한 부분인 후반부에 들어서는 나 혼자 독점을 했다. 남편은 옆에서 쿨쿨 잠이 들었고, 1990년대에 본 ‘웨딩 방켓’ 서부터 좋아했던 웨체스터 주민-라치몬트에 산다.- 앙리와 열정과 집념의 핸섬 보이 밴 애플랙과 ‘실버라이닝 플래이 북’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당차고 아름다운 새별 제니퍼 로렌스, 그리고 당연하게 여겼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승리가 나의 승리처럼 기뻤다.

작품상을 부른 미셸 오바마의 멋진 모습을 보면서 박근혜 대통령도 그 열정으로 저렇게 자연스럽게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사 잡을 당당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다음 날 아침, ‘여보 링컨이 주연 상 탔어.Argo가 작품상이야.’ 남편에게 가르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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