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쿠앙 선사

2013-02-1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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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짜장면! 하면, 그 이름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돌게 되는 음식이다. 그 짜장면과 떨어질 수 없는 반찬이 바로 단무지다. 얼마 전까지도 단무지를 일본 말로 ‘다쿠앙’이라고 불렀다.

다쿠앙이란 이름은, 조선인 스님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택연(다쿠앙) 선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이 있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그 선사의 출생지는 일본이며, 일본 전국시대 말기를 살다간 다쿠앙 소호 선사(1645년 몰)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선사는 일본 불교사에 그 명성이 꽤나 높은 스님이다.


선사는 말년에 도쿄의 동해사란 절에 머물고 있었는데, 선사의 평소 식단은 아주 조촐했다고 한다. 끼니때면 나무 밥그릇 절반 정도의 잡곡밥과 무짠지 서너 조각, 그리고 한 사발의 맑은 석간수가 전부였다니, 수행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가 있다.

어느 날 그 절로 당시 막부의 쇼군(우두머리 장수)인 도쿠가와 이에미스가 찾아온다. 두 사람은 담소를 즐기다가 마침 때가 되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매끼 기름진 음식만 먹던 최고 권력자는 선사가 내놓은 소박한 밥상을 받게 되고, 평소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짠지라는 것을 맛보게 된다. 노리끼리하고 짭조름하며 달착지근하고 그러면서 담박한 그 맛에 매료된 쇼군은 선사께 그 이름을 물었지만, 선사는 이름은 없고 그냥 절에서 먹기 위해 무를 소금에 절인 무짠지라고 했다. 그러자 쇼군은 맛이 별미인데 선사께서 고안했으니 앞으로 이 무짠지를 선사의 이름을 따 다쿠앙이라 부르기로 하자고 즉석에서 제언했다고 한다. 그 후 ‘다쿠앙‘은 쇼군의 지시로 전 일본에 보급되어 국민반찬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구한말 일제의 한반도 침략기에 들어오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다방면에 능했던 선사는 특이하게도 검도와 선을 접목하여 살상을 위한 기술인 검술을 수행의 일환인 검도로 승화시켜, 그 시대 대표적인 병법서가 된 ‘부동지신묘록’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 저술은 당시 전국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에도막부가 막 자리를 잡아 가던 때, 일본을 통일한 무장집단으로 피에 굶주린 사무라이들을 평화의 시대에 안주시키기 위해, 실전보다 좌선과 같은 정신수양을 강조하는 불교 철학의 핵심인 부동심을 설파하여, 무사도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저술의 핵심은 불교의 무심사상을 바탕으로 한 부동심으로 바깥 경계에 동요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이며, 마음이 어떤 한 곳에 집착하여 멈추면 마음을 뺏기게 되므로, 어떤 것에도 ‘마땅히 머물 바 없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쿠앙 선사 자신의 부동심이 어떠한 경지인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농염한 기녀의 나신이 그려진 그림을 들고 선사를 찾아와, 짓궂게도 그 그림에 찬(다른 사람의 서화를 기리는 글)을 청했다. 살 발라져 형해만 남은 차디찬 고목 같은 선승이기에 다만, ‘사람’의 뜨거운 피가 돌아 고목에 꽃이 필 것인지, 아닌지를 헤아려볼 속셈이었다.

그 그림을 본 선사께서는 다행히(?)도 두 눈이 휘둥그레져, 대뜸 ‘좋구나, 좋다’ 하시다가, 이내 겸연쩍고 무람한지 힐끔힐끔 하시다가, 그래도 어쩌랴 벙긋벙긋 하시다가, 그러나 이렇게 찬을 써내려 갔다.

“부처는 진리를 팔고/ 조사는 부처를 팔고/ 말세 중들은 조사를 팔아 사는데/ 그대는 다섯 자 몸을 팔아/ 중생을 편안케 하는구나/ 색즉시공 공즉시색/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고/ 달은 밤마다 물위를 지나건만/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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