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수는 울었다

2013-02-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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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예수는 울었다(Jesus wept)"라는 낱말 두 개로 한 절을 구획한 것이(요한11:35)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절을 결정하는 학자들이 이 한 마디를 얼마나 중요하다고 보았기에 독립된 한 절로 할애하였을까! 예수의 설교를 보면 그의 유머감각이 뛰어남을 본다. 그러나 예수가 웃었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흐느껴 우는 그 울음은 오빠를 잃은 마르다 마리아 형제에게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을까! “예수가 울었다”는 이 한 마디는 예수가 일으킨 사랑의 공명(共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되어 퍼지는 사랑의 울림을 말하는 것이다.

대만의 신학자 송성천(宋盛泉)은 중국 일본 한국의 고전시를 비교 연구하고 그 공통점을 ‘울림’으로 보았다. 가령 아리랑에서 여러 고개를 극복하고 마지막 고개에 도전하는 지친 나그네의 발걸음 소리에서 억압과 가난 속에서도 끈질기게 도전하는 한국 민족의 울림을 그는 찾았다. 중국 고전시의 거장 쑤퉁포(11세기)의 시에 “내 창자에서 움이 트고 내 허파와 염통에서 대나무가 자란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고통 많은 육체 속에서 새 싹이 돋고 대나무의 약동을 듣는다는 것은 육신적인 고통을 정신적인 방법으로 승화시키는 중국인 특유의 울림이라고 한다.


언덕 위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며 흐느껴 울던 예수의 울음소리, 그것은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는 동족에 대한 긍휼의 울림이었다. 한국어의 ‘울다’와 ‘울림’이 같은 어간(語幹)을 가진 것은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엿보인다. 초상집에서 여럿이 곡을 하는 것도 고인에 대한 애도보다는 유가족과 문상객들이 슬픔을 나누어 가지는 울림이라는 점에서 생긴 풍습이었다.

명설교가였던 뷰크너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지난 한 달 사이, 혹은 1년 동안에 당신이 울었던 일을 더듬어 보십시오. 그 순간이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정직했고, 오래 잊어버렸던 당신의 뿌리를 어루만진 순간이었습니다. 그 밑바닥 뿌리에서만 당신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사순절(四旬節, Lent)이다. 부활절을 앞둔 이 한 달은 참회(懺悔)의 계절이라고도 불린다. 근래 울어본 기억이 안 난다는 사람은 이 사순절에 진한 눈물을 한 번 흘려보는 것도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참회(회개)는 두 개의 눈을 가진다. 하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지난날을 돌이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감격에 찬 눈동자로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다. 회개란 나만이 알고 있는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마음을 가장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신다. 유창하게 기도하며 자기를 내세우는 바리새인은 전형적인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稅吏)의 기도가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가르치셨다. 회개란 하나님 앞에 결손해지고 자기의 자랑과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용서에 매달리는 믿음의 행위이다.

크리스천이란 남달리 착하거나 거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을 가리킨다. 회개한 죄인, 아니 날마다 회개하는 된인,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날마다 노력하는 사람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고백하는 사람, 고백하는 교회, 고백하는 국민이다. 1,000 가지의 선행을 쌓아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 인간의 기술과 재물로 바벨탑을 쌓아도 하늘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신의 진노를 잔잔케 하는 유일한 제물이 회개이다. 예수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회개가 선행되지 않은 예배는 무효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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