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수도와 하수도의 파이프

2013-02-0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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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부엌이나 변소에는 상수도와 하수도로서 물 흐름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와 더러운 물을 나르는 하수도인데 이 둘이 없으면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 이 두 물을 공급하는 데에는 파이프란 이름의 통로를 이용하는데 상수도 파이프에서 나온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쓰고 나면 더러워지고, 더러워진 물은 하수도란 이름으로 연결을 해 놓은 파이프를 통해서 되도록 멀리 보낸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신체에도 동맥이 있고 정맥이 있어 동맥은 깨끗한 피를, 그리고 정맥은 더러워진 피를 나누어져 있는 핏줄을 통해서 나른다. 육신의 생존 원리다. 깨끗한 물을 나르는 파이프는 기꺼이 만지지만 더러운 물을 나르는 피이프를 즐겨 만지는 사람은 없다. 그 안에 더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기를 보면 더러움이 없이 천진난만하기만 한데 나이가 들면서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이상한 버릇이 생기고 남을 귀찮게 하거나 해코지 하는 버릇이 생긴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이 생기게 되는 이치가 싹을 보면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기에 여러 방면으로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 속의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는 속담이 사람 사는 세상에 흘러넘친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외로워도 문학정신의 꼿꼿한 정신철학이 생명인데 이득에 따라서 왔다갔다 변덕을 부리는 사람, 기회가 왔다하면 과거를 동댕이치고 배반을 일삼는 사람들 때문에 문학이 얼굴을 붉히며 스스로 저물려고 서산을 넘는다. 서점들이 문을 닫고 출판사들이 활자를 거둔다. 문사들이 설 자리를 다 잃어가고 있다. 아니 다 잃었다.
아무리 위장을 해도 더러워진 물이 철철 흐르는 문학계의 파이프를 만지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퀸즈 도서관에 가보면 중국인인 많이 보여도 한국인은 보이지 않는다. 문학이 사람을 떠났기 때문이다. 시인은 가난해도 시인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본질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청아한 본질에서 노니기를 즐겨 한다. 본질에 사악한 것은 없다.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득을 챙기려고 야합하기를 즐겨한다. 문인이란 명칭은 벼슬이 아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에 야합이란 이름을 달고 사는 사람은 없다. 흔적 없이 사라질 잡문을 쓰면서도 문인이란 이름을 달고 문학단체를 어슬렁거린다. 문학단체의 장이면 무슨 덕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문단정치를 도모한다. 무엇이 문학을 처참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서점이 문을 닫고 출판사가 활자를 거두고 문을 잠그게 했을까?
가난해도 시인을 동경하는 세상이 있었는데 시인이란 명칭은 냄새나는 양말만도 못하게 된 세상이니 이 세상을 아름답다 하겠는가? 누가 시인을 이 처참한 꼴로 추락을 시켰을까?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다. 생수가 흘러가는 파이프가 아니라 구정물이나 오물이 흘러가는 문학 파이프, 깨끗한 생수가 흘러야 할 파이프가 구정물이 흐르는 파이프가 되어 세상 밑에 놓여 있다.

문학이 울고 문학사상이 울부짖고 있다. 현대문학을 탄생시킨 전후문학 시대와 전후 문학시대의 문학정신과 그 시인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문학과 문학 사상이 울고 있다. 시인은 인간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는 상수도 파이프라고 여겼던 시절은 사라지고 오물만 흐르는 현대의 문학 파이프를 바라보며 생수가 다시 흐를 수 있는 생수의 근원이 어딘가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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