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중물 사랑

2013-01-2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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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 정한나 <남가주광염교회 사모>

유년시절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 있었다. 물론 집에 수도가 있는 집도 있었지만 친구 집 마당에는 수동식 펌프가 있어서 여름날, 학교 파하고 집에 오는 길에 들러 펌프질을 하면서 하하 호호 물놀이를 한 적도 있었다. 가끔 우리 집에도 펌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교회와 붙어 있는 목사관 사택 마당엔 펌프 대신 높은 종탑이 하늘을 향하여 뻗어 있었다.

어릴 때 장난치듯 하며 놀던 펌프질이 요즘 왜 그렇게 그리워지는지… 가끔씩 일상을 멈추고 눈을 감으면 어느새 펌프가 있던 친구 집 마당 한가운데 서 있기도 한다. 펌프 옆엔 항상 함지박이 있었고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물을 한 바가지 가득 퍼서 펌프에 붓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우물물이 파이프를 타고 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때 넣는 물 한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불렀다. 마중물이 파이프를 타고 들어가 아래에 있는 우물물과 딱 마주치면 펌프질해서 생긴 압력으로 인해 물이 위로 올라오게 된다고 한다.


마중물을 붓는 것처럼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 보이지 않는 저 깊은 땅속에서 흐르는 샘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쏟아 부어지는 마중물은 참 고마운 축복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숨어 있다.

비록 지금은 별 볼 일 없어 보이고, 간간히 실수도 해서 주위를 안타깝게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인정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감을 가지고 용감하게 세상을 이겨 나가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평강공주를 만난 바보온달이 장군이 되었고, 저능아로 취급받아 학교를 쫓겨난 에디슨이 그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이끌어준 어머니 때문에 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발명왕이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린 늘 나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주는 일에 너무나 인색한 것 같다.

요즘 모두가 어렵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어주는 일은 맘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 아닌가?

마중물은 남이 부어줄 수도 있고, 나 스스로에게도 매일, 매순간 한 바가지씩 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기엔 그냥 물 한 바가지일 뿐이지만, 그 물이 끌어올려내는 깊은 샘물은 온몸의 기능을 살려내는 힘이 되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힘까지 길어내는 은혜의 샘물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기운을 잃은 상대방에겐 격려의 말 한마디,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 표정, 어깨를 툭툭 쳐주는 사랑의 터치, 가슴을 진정시켜 주는 가벼운 포옹. 아니, 그냥 옆에 있어만 주어도, 그 답답한 마음을 아무 말 않고 들어만 줘도 샘물을 끌어올리는 마중물 한 바가지가 되지 않겠는가.

또한 스스로에게도 때를 따라 부어주는 마중물이 필요하다.

힘이 되는 좋은 생각, 양서를 즐겨 읽는 습관, 말조심, 눈조심, 손조심, 몸조심…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열망이 강하다. 그런데 자라서 보면, 나이만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닌 것을 느끼게 된다.

어른들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 큰 칼 옆에 차고 거대한 방패에 단단한 갑옷까지 입고 나타난다. 그러나 갑옷이 두꺼울수록 그 내면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작은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존재인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나와 세상을 살게 하는 깊은 샘물 한 바가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아낌없이 부어주는 마중물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 풍성한 나눔이 계속되는 한 그 어떠한 불경기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이미 우리에겐 보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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