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란 존재의 의미

2013-01-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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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누가 자신을 사랑해 줄까. 사람이 태어나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다. 부모의 사랑은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점점 멀어져 가게 된다. 청년기가 되면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서 세상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부모의 사랑은 여기서 멈추는 듯하다. 하지만 아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영원하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영원한 부모의 사랑이라도 부모가 자식을 대신해 아파트비를 내주면서 살아 줄 수는 없기에 그렇다.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 자신의 길을 찾아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낳아야 한다. 이때엔 부모의 사랑이 아닌 부부의 사랑, 즉 새로운 사랑 안에서 자신을 보듬어 가야 한다.


새 해 들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즐겁지가 않다. 우울하다. 그 소식들이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들의 소식이다. 왜 죽어야만 하나. 그렇게 죽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을까. 생명이 그렇게도 하찮은 것이었을까. 자기가 자신을 바늘 끝만큼이라도 사랑했더라면 그렇게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었을까.

1991년 문화공연기획사 ‘오픈워크’를 설립한 후 ‘명성황후’ 뉴욕공연의 총 코디네이터, 뉴욕현대미술관 MoMa의 ‘임권택, 신상옥, 김기덕감독 회고전’ 기획과 한인회 문화예술위원장 등을 지내며 문화사역에 기여해 오던 한 한인여성(54). 콜롬비아대와 FIT에서 공부한 재원. 그녀가 기차에 몸을 날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우울한 소식.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 인간이라 하지만, 환경을 극복하고 헤쳐 나가는 동물 또한 인간 아니던가. 상황이 극한에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만큼은 일어나지 않아야 되지 않나. 죽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죽을 만큼의 그 때 그 심정을 알 수 있으리요만,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자살자들의 그 당시 그 때 심정임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저자 전혜린. 31살의 나이에 요절한 한국의 번역문학가이자 수필가이다. 경기여고졸업 후 서울대법학과에 입학하나 독어독문학으로 전과하여 중퇴, 독일로 유학하고 귀국 후 성균관대 조교수가 된다. 1956년 결혼하여 딸을 하나 낳고 1964년 합의이혼 후 1965년 1월10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전혜린의 죽음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남성권위주적 사회와 법조인이였던 아버지가 딸에게서 바랐던 기대와 전혜린의 고뇌. 현대여성과 사회환경의 괴리에서 오는 고민. 그녀를 억누르는 환경의 압박에서 이겨나가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친 것이 그녀를 죽음에의 의지에 더 다가가게 하지 않았나 보는 것이다.

전혜린이 번역한 책 중엔 나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삶과 투쟁한 한 소녀의 책이 있다. <안네 프랑크-한 소녀의 걸어온 길>이다. 2년간 8명이 나치를 피해 다락방에 숨어산 이야기를 일기로 적은 내용이다. 안네는 밀고로 나치 수용소로 이동된 후 병으로 죽는다. 그 후 출간된 일기는 수십 개국의 언어로 출판돼 수 천만 명에게 읽힌다.

16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 안네였지만 그가 남긴 것은 삶에 대한 사랑이었고 삶이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려주었다. 정작 그 책을 번역한 전혜린은 무엇을 남기고 갔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상담학자들은 말한다. 자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어느 누구든 상관없이 자주 말하고 손을 내밀라고 한다. 삶을 구걸하란다.

구걸을 해서라도 살아남으라 한다. 구걸을 해서라도 자신을 사랑하라 한다. 현실을 도피하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 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란 말을 듣더라도 살아남으라 한다. 이 세상의 가장 에고이스트는 어쩌면 부모, 형제, 친구, 모두 다 마다하고 훌쩍 떠나버리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아닐는지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이기적인 사람이라 말하지 마라.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남도 사랑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부부의 사랑, 모두 좋다. 그러나 자신을 끝까지 지탱하게 해 주는 것은 자신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인 자존감, 즉 살아있는 ‘나란 존재의 의미’를 아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아는 자기가 자신을 존경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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