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갑과 을

2013-01-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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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새해가 시작되어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가장 큰 관심이 경제가 되고있다. 다들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가장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이 ‘갑’과 ‘을’로 나눠진 사회구조인 것같다. ‘갑과 을’ 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해 봤다.

2010년과 2011년 초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었던 MBC 드라마 ‘역전의 여왕’(극본 박지은)에서 재벌회장 아들에게 파트타임 여직원은 “세상은 갑과 을로 나누어졌다. 노력한 것 없이 부모 잘 만나서 본부장이라는 직책을 차지한 당신같은 자가 갑”이라고 말한다. 자연히 을은 `가진 것이 없이 갑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 이 되어버렸고 여기서 나온 신조어‘갑과 을’은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켜 지금은 고유명사처럼 수시로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갑과 을’의 관계를 다룬 개그콘서트 ‘갑을 컴퍼니’가 방영되며 사장과 상사, 신입사원 등의 다양한 캐릭터가 부딪쳐 살아가는 직장인의 애환을 다루고 있다. 갑과 을을 예로들면 대기업-중소기업, 경영주-직원, 유통업자-납품업자, 대졸-고졸, 우등생-열등생, 리더-팔로워 관계이다. 더 나아가서 용역회사-하청회사-재하청 회사로 갑-을-병으로까지 나누기도 한다.


즉 권력, 학벌, 재산, 명예 등을 가진 자와 못가진자, 처지가 유리한 자와 불리한 자로 나누는 논리이다.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자를 갑이라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 기를 쓰는 자를 을이라 한다면 뉴욕 한인사회에도 이 ‘갑을’을 적용시켜 보자.
미주한인사회에는 ‘단돈 200불 들고 미국땅에 내려 새벽부터 일하고 노력해 자수성가했다’는 이민 스토리가 아주 많다. 그야말로 맨손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이들은 을이 갑이 된 ‘역전의 왕’, ‘역전의 여왕’일 것이다.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갑은 갑끼리, 을은 을끼리 어울리는 것도 볼 수 있다. 이는 휴일도 없이 가게문을 열어야 하는 사람과 매일 골프를 치거나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간에 나눌 공통적인 대화가 얼마나 있을까를 떠올리면 그럴 수 있다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자는 끼리끼리 교제하고 결혼하고 영원한 갑의 자리를 누리려 하는 것인가 할 것이다.주위에 잘사는 친척에게 따돌림 받던 이민 1세가 있다. 그는 자신도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생계유지를 위해 늘 블루칼라 일을 해야 했고 자식만은 어떻게든 공부시켜 남들이 부러워하는 전문직으로 키워냈다. 자신은 영원한 을의 위치에 머물지라도 내 자식만큼은 갑의 자리에 머물러 살기를 원했다.

그는 결혼적령기가 된 자녀에게 ‘한쪽이라도 기댈 언덕이 있는 곳’으로 결혼하기를 바라지만 이것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갑이 뭐고, 을이 뭐야? 그 자체가 차별이지. 내가 갑이면 상대는 을을 고르면 되잖아. 그러면 갑과 을이 대등해지지. 내 친구네는 엄마, 아빠가 일이 없어서 논대, 일하는 사람은 내 친구 혼자야. 그 집에서 보면 우리집이 갑이야. ” 하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 아들은 결혼을 앞두고 부모에게 신신당부 했다고 한다.

“남들 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혼수자금 받지 마. 앞으로 로펌 파트너 되면 내가 얼마나 많이 벌 텐데. 나 키워서 장사하려 한 것 아니잖아.”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하려하고 부모의 덕을 입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 교육방식이 고맙다고 해야 할까, 신데렐라 콤플렉스 없이 평등사상을 지닌 것이 장하다고 해야 할까. 때로 섭섭하긴 하지만 부모보다 성숙된 사고방식이 이민 1세를 일깨운다.

갑이라고 행복하고 을이라고 행복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마냥 좋지만도, 마냥 나쁘지만도 않을 터, 각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갑이 을로, 을이 갑이 되지도 않겠는가. 또 갑이든 어떻고 을이든 또 어떠랴, 갑과 을을 수직적 관계가 아닌 ‘갑돌이와 을순이’처럼 수평적 관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걸어가며, 함께 세상을 사는 파트너이자 동반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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