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새하얀 캔버스 앞에서

2012-12-3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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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새로 태어난 아기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울고 웃고, 몸을 움직이고, 먹고 배설하는 따위를 가리킨다. 생존할 수 있는 첫 단계의 일은 본능적으로 해결한다. 그 다음 단계인 원하는 일을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인생의 끝까지 배움의 과정이지만 아기가 첫 출발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는 데 뜻이 있다.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미술작업이다. 제각기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다. 미술시간이란 다만 학생들을 자극하고, 좀 더 효과적인 창작 방법을 찾게 하고, 여러 가지 자료를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먼 옛날 원시인 거주지였다고 생각되는 동굴에서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글씨가 생기기 전에, 인간은 우선 그림 그리기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이토록 그림은 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표현할 수 있는 소위 타고난 기술이다.


직장을 은퇴한 분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붓글씨를 쓰기 시작하여 작품 전시회를 여는 경우가 자주 있다. 어떤 분은 이를 60세에 시작해도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음악은 단계적인 훈련을 쌓으면서 기술을 연마하지만, 미술은 오랫동안 쌓인 인생 역정이, 작품 제작에 반영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듯하다.

2013년의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하지만, 우리 모두가 새하얀 캔버스 앞에 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캔버스의 주인이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새해의 의미가 변화할 것이다. 좋은 새해를 맞기 바란다고 꼭 그렇게 되는 것일까. 새해를 위한 수동적인 각자의 기원보다는, 능동적으로 자기 스스로 쌓아올리는 노력과, 그 결과가 정비례하지 않을까. 더 확신을 주는 방법은 기원과 노력을 병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건강하세요”는 본인의 건강관리가 따라서 효과가 난다. “좋아하는 일 많이 하세요”는 실천이 따라서 말의 성과를 올린다. “재미있는 생각 많이 하세요”는 다양한 생각의 실천이 있어서 빛이 난다. “부자 되세요”는 부지런한 생활이 있어서 이루어진다. “여행 많이 하세요”는 치밀한 계획이 있어서 실천할 수 있다. “친구 많이 사귀세요”는 내 마음을 활짝 열어서 다른 사람을 맞이하게 된다. “많이 나누세요”는 욕심을 떠나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세계이다.

새해는 새해이다. 아득한 옛날 시작한 인류 역사가 영원히 이어질 세월을 알맞게 구분하여, 지난 해와 새 해로 나눈 인간은 슬기롭다. 이런 구분으로 생활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산이 산인 것처럼, 새 해는 새 해이어서 마음이 설렌다. 주위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며, 새롭게 다가온다. 무엇인가 새로운 희망을 보면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하지만 내가 새로움을 창출하는 것은 내 자신이 할 일이다.

“모든 것이 어제하고 똑같은 데 왜 새해라고 해요?” 어린이가 묻는다. “그럼, 맑은 물로 세수하고, 눈을 감았다가 떠 봐.” 그래도 새 것이 없다고 어린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새 해는 맞이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까다로운 성격이 있어. 새해가 좋으면 2013년아, 같이 놀자고 말해 봐.” 어린이가 그대로 말하고 깔깔 웃는다. 그래서 웃으며 맞이하는 새해가 된다.

지키지도 못 할 새해의 결심을 하는 것보다, 손잡고 같이 놀 생각으로 새해맞이를 하는 편이 부담이 없다. 그래서 새하얀 캔버스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새해를 디자인한다. 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몇 가지를 다른 색, 다른 모양으로 그린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내 자신이 격려 받을 수 있도록 거기에 재미있는 부호를 첨가한다. 이것으로 새 해의 계획을 알 수 있는 디자인이 완성된다. 새 해는 새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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