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십이만오천육백분

2012-12-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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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일년간 나는, 우리는, 무엇을 했고 어떤 것을 이루었는가? 지난 일년을 마무리하면서 주위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연하장으로 부지런히 인사를 챙기는 시기이다.

2000년 초연이후 성황리에 공연되며 한국에서도 6번의 앵콜 공연을 가진 바 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렌트’(Rent), 지난가을 ‘2012년 오프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공연을 끝낸 유명 뮤지컬 렌트를 한번쯤 본 한인들이 많을 것이다. 이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 ‘Seasons Love’ 가사 속에서 1년을 오십이만오천육백분으로 노래한다.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의 시간,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의 소중한 시간을 당신은 어떻게 지내나요, 어떻게 일년을 보내나요. 낮으로, 저녁으로, 한잔의 커피로, 인치로, 마일로, 웃음과 싸움으로,......사랑은 어때요? 사랑으로 지내는 것 어때요? ”하는 가사다.


또한 “우린 렌트를 낼 수 없어, 작년에도 안냈고 올해도 안냈고 내년에도 안낼거야, 어차피 우리 인생은 빌린 거니까 사랑을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빌릴 수는 있어”라는 노래도 있다.

이는 사랑도 인생도 언젠가는 끝나는 것이지만 빌릴 수는 있다는 것이다. 빌릴 수밖에 없는 인생이고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이지만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의 소중한 시간들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파트 랜드로드가 들으면 세입자들의 횡포와 뻔뻔함에 복장 터질 노릇이지만 이들 가난한 예술가들은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른다’며, 언젠가는 지금보다 나아지겠지, 지금의 처지를 비관하지 말라고 전한다.

뉴욕의 연말 분위기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이 뮤지컬은 왜 일년을 분으로 나타냈을까? 1년은 365일로 하자니 누구나 아는 흔한 표현이겠고 8,760시간이라고 하자니 한 시간 내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므로 별로 시간의 중요함을 모르겠다. 그렇다고 3,153만6,000초로 표현하자니 너무 광범위하고 무얼 할 지 모를 정도로 엄청나 시간 개념이 잘 안잡힌다. 그러니 귀하고 중요한 순간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 분일 것이다.

이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의 시간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였나요?
2012년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큰일들이 뻥 뻥 터져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불과 두어 달 전에 초강력 허리케인 샌디가 몰아닥쳤고 총기난사 사고가 되풀이되었고 새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12월초부터 폭설에 혹한이 계속 되고 역시 새대통령을 선출했다.

뉴욕에 사는 우리들도 덩달아 바빴다. 시민권자 한인들은 오바마냐, 롬니냐를 두고 선거에 참여했고 한국국적 한인들은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재외선거에 참여하여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서 유권자로서 한 표를 찍었다.
2012년 우리에게 주어졌던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을 다 쓰고 나면 2013년의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이 다시 온다. 어제나 오늘이나 다 똑같은 시간이 지나갈 뿐인데 사람들이 올해, 내년을 만들어놓고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시점을 만들고 있다.

올해 며칠 남은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4,320분~7,560분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일년을 돌아보고 정리하자. 그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맺은 인연을 떠올리고 사랑을 전할 시간이다.


지난 2012년을 돌아보면서 좋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자. 지난 시간들이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찾아보면 ‘그래, 잘했어, 장한 일 한 거야’ 하며 흐뭇해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늘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쳐왔다면 지금이라도 먼지를 닦고 깔끔하게 손질하여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자. 또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새로운 계획, 새로운 취미, 새로운 책을 설레며 기다리는 것도 미완의 삶을 좀 더 충실하게 사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 인생에 얼마나 많은 날들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힘들어하고 내버려두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오늘 이 시간,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우리의 오십이만오천육백분의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민병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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