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니깽과 한인교회

2012-12-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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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오는 16일 뉴욕효신장로교회에서 멕시코 한인후예를 위한 자선음악회가 열린다. 주최측은 이번 음악회를 계기로 애니깽에 대한 한인사회의 이해와 관심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애니깽에 대한 책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은 조선최초의 멕시코 이민자들의 이동로를 따라가며 비록 힘들게 살았지만 그들이 어떻게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애썼는지를 다룬다.

소설은 고아, 대한제국 군대의 병사, 몰락한 양반, 파계한 신부, 박수무당, 왕실 아악부 내시, 좀도둑 등 다양한 출신성분의 사람들이 일터와 돈, 밥을 찾아서 이 땅을 떠난다. 돈을 벌면 다들 돌아올 생각을 하고 갔지만 대륙식민회사의 농간에 속아 4년간 채무노예로 멕시코 유카탄의 여러 농장으로 분산돼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일한다.


4년후 자유신분이 되나 돌아갈 배삯도 없고 일본의 식민지로 사라진 조국에 갈 수도 없었다. 일부는 멕시코에 일어난 혁명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리고 이웃나라 과테말라 정변에 용병으로 참가한다. 물론 글은 이정과 이연수의 사랑, 파계한 신부가 무당의 내림굿을 받고 내시가 용병이 되는 등 갈등과 재미를 곳곳에 깔아놓았다.
10년전 미국 이민 1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우리는 1902년 12월 22일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한인 103명이 미국 첫 이민자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있다.
같은 시기인 1904년 4월4일 영국기선에 탄 조선인 1,033명(남자 802명, 여자 231명)은 제물포항을 출발, 멕시코 유카탄 메리다 지방 애니깽 농장에서 불볕더위 아래 채찍에 맞고 애니깽 가시에 찔려 손과 발에 피가 나면서 애니깽잎을 따야했다.

애니깽은 에네켄(Heneguen, 마야어)을 우리 식으로 편하게 부르는 이민자를 뜻하는 말이다. 애니깽은 멕시코가 원산지로 나무처럼 단단한 짧은 줄기에 잎이 달리며 선인장처럼 잎 가장자리를 따라 딱딱하고 뾰족한 가시가 무수히 나있다. 애니깽은 선박용 로프의 원료가 된다.

때를 같이 했음에도 이 배를 탔느냐, 저 배를 탔느냐에 따라 자신은 물론 가족, 후손까지 대대로 운명이 갈렸다. 우리가 운이 좋았다고 하기 전에 제1호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온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였다. 인천 내리감리교회 존스 목사의 권고로 이민을 결정한 이 교회 교인들은 1903년 7월 4일 하와이 최초로 목골리아 한인교회를 세웠고 11월에는 한인감리교회가 세워지면서 이후 교회는 한인사회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05년 7월 일본이 이민을 중단시키기까지 16차 선편으로 약 6,750명이 하와이로 건너갔는데 이중 평신도는 400여명, 전도사, 권사급 지도자들이 3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 온 우리들은 이렇게 종교의 힘으로 하나로 뭉치고 단합되었기에 오늘날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잘 살고 있다. 하지만 멕시코로 간 이민자들은 성분이 저마다 달랐고 넓은 땅에서 하나로 모이는 구심점이 없었고 불행히도 살고있는 땅이 전쟁터가 되었다. 비록 성공한 미국 이민자와 잊혀진 멕시코 이민자로 운명이 달라졌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하와이 이민자들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으로 모은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내놓았듯이 멕시코 이민자 역시 애니깽농장 노동으로 모은 한두푼을 아낌없이 독립자금으로 내놓아 임시정부에 보내졌다.

생계유지와 목숨 보전에 급급했던 멕시코 이민자들은 마야족 후예와 섞이면서 한국말도 풍습도 잊어버린 채 3~4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 멕시코 고유의 성이 아닌 우리의 성과 비슷한 진, 챙, 이 등의 성을 지닌 자들이 제법 있다 한다. 이 잊혀진, 슬픈 한민족의 후예들이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는데 같은 이민자인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뉴욕에서 개최되는 이 자선 음악회에서 모인 기금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 참포톤 선교지의 애니깽들을 위해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의 장을 마련한다고 한다. 인천의 교회 신자들이 한인이민자의 시조가 되었듯이 한인교회의 따스한 손길이 애니깽 후손들의 아픔을 위로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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