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돈에 대한 올바른 철학

2012-12-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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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목사)

자본주의의 모순인 ‘빈익빈 부익부’가 평등을 표방하는 민주사회 속에 깊이 종식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엥겔 법칙’은 가계에 있어서 식료품비가 생계비 속에 차지하는 비율이 가난한 사람일수록 높다는 법칙이다. 환언하면 부자들은 무슨 꽃을 보며 식사를 즐길 것인가? 화려한 고민을 하지만 빈자들은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예와 같을 것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는 이농현상으로 이어졌고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려 농촌교회는 가난하게 되었고 도시교회는 부하게 되었다. 필자도 그때 농촌미자립 선교정책을 세우고 빈부격차의 모순극복을 위해 노력한 적도 있지만 ‘들어갈 줄만 알았지 나올 줄 모르는 돈의 속성’만큼이나 도시 부자교회들의 인색한 면모를 관찰할 수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완성된 유물변증 철학 사상도 사실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힌트를 얻은 경제이론이다. 예수 재림이 임박했다고 긴장하던 당시 교회는 성도들의 헌금과 기부로 운영되었고 일곱 집사를 뽑아 궁핍한 자를 구제하고 물건을 공유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공동체 정신이 중세에 이르러서는 타성과 관행에 빠져 십자군 전쟁 등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며 역사를 퇴행시키더니 이윽고 인도주의와 휴머니즘이 희석된 기독교사상 뿐만 아니라 인문, 자연, 과학, 음악, 예술 따위 들을 ‘신의 밧줄’에 묶어놓고 한발자국도 발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중세 암흑기의 죄상이다. 그때 중세교회도 요즘의 한국교회와 같이 교회당 건축 붐이 있었는데, 자금조달을 위해 면죄부로 교인들과 흥정하고 있었다.

요즘 교회마다 외치고 있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도 뚜껑을 열어보면 교회성장만 꽤하며 집단 이기적 개 교회주의 색채를 띠어 변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맑스가 경제 원리로 까지 채택했던 모델 즉,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이 낸 헌금이 유용되지 않고 이웃과 사회에 환원되는 ‘올바른 돈에 대한 철학’의 성서적 배경이 뒷받침하고 있다.

예수는 빈곤하게 말구유에서 태어나 빈민들과 일평생 보낸 무소유의 선구자였고 그는 ‘거저 주라’ ‘남을 섬기라’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였다. 제자를 택할 때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였다. 이 같은 예수의 유전자를 받은 현대교회와 오늘날 제자들도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망각할 수가 없다.

수학에서 ‘황금분할’이란 1:1.618로 나눈 직사각형을 말한다. 요즘 애플이나 삼성이 황금알을 낳은 이유도 손에 착 감기는 황금분할 디자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인 빈부격차 1:99도 이사야의 ‘높은 산으로 계곡을 메워...’라는 ‘메시아’의 테너 아리아의 가사처럼 된다면 이상적인 황금분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착취의 대병사와 같았던 사깨오도 예수를 만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름 그대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내가 사배나 갚겠나이다”하는 깊은 성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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