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언어의 다리를 놓다

2012-12-0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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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북한여행에서 걸어 건너간 압록강철교는 현재까지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다리 밑을 흐르며 출렁대던 강물, 기차가 지나갈 때 온몸이 흔들리던 공포, 다리를 건너자 중국 안동현(단동)이라는 사실...등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만일 뉴욕과 뉴저지 사이에 다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아마 두 지역은 제각기 색다른 생활권을 이룰 지도 모른다. 허드슨 강이 두 지역을 고립시켰을 테니까.

‘다리’는 두 지역을 이어줄 뿐만 아니라, 생활물품의 교환, 문화와 인적 교류를 넘어서, 우정을 맺고 정서의 흐름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이와 같이 다리는 가족간의 사이, 사회인의 세대 사이, 민족간 우열의 사이, 여러 나라들이 가지는 국력의 강약 사이를 조정하고 해결한다. 그럼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한가.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말과 글’이 있어서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 세계인이 제각기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것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무엇인가. 그렇다. 제각기 다른 생활용어와 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 또한 가지고 있다. 바로 ‘통역과 번역’이다. 다른 말 사이의 다리는 ‘통역’이고, 다른 글 사이의 다리는 ‘번역’이다. 따라서 한국말을 통역하고, 한글을 번역하는 것으로 다리를 놓을 수 있다.

한국문학 작품이 아직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이유가 번역사업이 활발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설명은 일리 있다. 번역이란 말은 쉽지만 힘든 일이다. 필자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외국어로 한글작품을 번역한 체험에 따르면, 차라리 작품을 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외국 작가의 글에 따르면, 원작가는 번역할 사람과 함께 몇 개월 같이 생활하면서 그 일을 맡긴 결과 겨우 마음에 드는 번역본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얼마 전에 어린 번역가들의 표창식이 있었다. 그들은 한글을 영어로, 영어를 한글로 바꿀 수 있는 재주를 보였다. 이 어린 번역가들은 장래 영어와 한국어를 번역할 수 있는 새싹들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세계인이 사용하는 언어 중에서 영어에 능통할 수 있다. 문제는 통역이나 번역이 두 가지 이상의 언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계속 생활할 경우 영어에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한국어도 같은 수준으로 말하고, 읽고, 써야 한다면 문제가 된다. 두 가지 언어 중 어느 한쪽 능력이 약하더라도 통역이나 번역의 적임자가 될 수 없다.

해방 직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많은 궁중 앞에서 귀빈이 연설을 하고, 통역관이 그것을 통역할 때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 귀빈 연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 한마디를 했었다고. 그러자 통역관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러분, 한바탕 크게 웃으십시오. 이 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모양인데 저는 내용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청중이 한바탕 웃었고, 그 연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연설을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통역관이 당시 상황에 따라 덤비지 않고 발휘한 재치에 감탄하면서 즐겁게 듣던 이야기다.

또한 이는 통역의 어려움도 알려준다. 어느 번역가는 그 나라의 풍습에 익숙지 않아 엉뚱하게 번역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글을 썼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번역가들, 통역가나 번역가는 멋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 하고 싶다면 한국어와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바란다. 그런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언어생활에 각별히 유의할 수 있는 기회 마련과 끊임없는 자극과 격려가 있기를 바란다.

70억 지구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있는 것이 아니다. 길고 짧은, 굵고 가는, 보이고 안 보이는 다리로 이어져 있음이 다행이다. 우리는 그 다리 위에서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을 만들고 있다. 이는 통역과 번역이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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