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속빈강정

2012-11-28 (수)
크게 작게
여주영(주필)

우리 전래 속담에 ‘속빈강정’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을 주변 외국인에게 설명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말의 참뜻을 제대로 살리면서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때는 해당되는 상황이나 사례들을 떠올려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 도처에 속빈강정이 널려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요즘 어린아이들을 떠올려본다. 우리가 옛날 자랄 때는 풍족히 먹고 살지 못해 얼굴에 버짐이 피어있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아마도 영양소 부족 때문이었으리라. 그 당시 아이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기(氣)만은 충만해 있었다. 기가 살아서 신명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생명력은 꼭 음식의 풍족함에 직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음식이 풍족한 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얼굴은 대체로 하얗고 말끔한데 왠지 생기가 없고 핼쓱한 아이들이 주변에 많아 보인다. 이 애들은 조금만 건드려도 울고 툭하면 부모에게 떼쓰고 의존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이들이 자라서 훗날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아는 집 부부는 자기 자식에게 독감예방 백신주사를 맞히지 않는다고 한다. “걱정이 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병원균이 나중에 실제 들어와서 독감이 걸려 앓으나, 미리 균을 주입해서 앓으나 병균이 몸속에 들어오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하여간 속빈 강정이 되지 않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내실있게 성장해야 한다고 본다.


그동안 미국에는 세계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왔다. 지금도 여전히 들어오고 있다. 이들이 미국을 동경한 이유는 속빈강정이 아니라 무언가 진정한 내용이 있는 사회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심히만 하면 성공의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는 그 믿음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신화가 한 물 갔다는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고 있다.

오래전에 디트로이트로 건너가 사업을 해서 꽤 기반을 닦았다는 한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요사이 디트로이트의 실체는 그야말로 속빈강정이라고 한다. 미국 산업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자동차 산업의 전진기지가 문을 닫게 되면서 이제는 도시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전락했다고 했다. 직접 가서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도시가 공동화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괴기스러운 회색도시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오죽했으면 어떤 젊은 사업가가 디트로이트시의 그런 버려진 모습 자체를 활용해서 거대한 괴기도시 테마파크로 만들겠다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제안까지 하였다고 할까.

불과 얼마 전까지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로 손꼽히던 스페인, 그리스 같은 나라들이 요즘 엄청난 실업률로 매일 데모의 천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전문가들 분석에 따르면 이들 국가의 실업률이 2차대전 전 대공황 때 절망적이던 당시 실업률에 거의 육박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스페인 해변에 가보면 휘황찬란하게 지어진 고급스러운 휴양단지들이 즐비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는 자금부족으로 짓다가 공사가 중단된 단지들도 상당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곳에는 현재 거주민도 많이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여름휴양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와서 즐길만한 자금이나 심적 여유가 거의 없는 모양이다.

그동안 많은 사상가들이 그토록 경고해왔던 21세기 물질문명의 말로가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물질문명 사회로 치달아도 언제나 삶을 올바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내실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선조들이 강조하던 ‘속빈강정’ 론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돼새겨 봐야 할 세상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2012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한해 삶을 얼마나 알차고 실속있게 장식했는가 각자 점검해 볼 때다.
juyoung@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