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꿈과 희망, 그리고 소원

2012-11-17 (토)
크게 작게
김 윤 태 시인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우리의 꿈이었으며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소원이던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곧잘 듣는 말이 “너,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크면 “네 꿈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서 장래의 포부를 진단하곤 했다. 이건 모두 남들이 나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어느 날 부터인가 스스로 희망이란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도 많았지만 뭐 특별히 짜여 진 것도 없으면서 막연하게 희망이란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이 시키지도 않은 그 화려한 잡다한 꿈을 들고 방황하기도 하고 고민을 하기도 하고 의기가 충천 할 때고 있는가 하면 한숨을 내 쉴 때도 있으면서 사춘기를 보낸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못하거나 가난하거나 나라가 가난하면 그 열이 심하기도 했다.

미국까지 와서 많은 세월을 보냈는데도 꿈과 희망을 되짚어 보는 사람은 별반 많지 않다. 만사를 포기한 사람들처럼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산다. 이민이 다 그런 것일까? 어떤 사람은 미국이란 나라도 다 그렇고 그렇지 무슨 놈의 기회의 나라냐 하면서 살고, 어떤 사람은 사면 살수록 혹독해 지는 인생살이가 미국의 선물이라 하면서 할 수 없이 그냥 산다. 처음부터 어려움이나 가난을 원한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불행을 원한 사람도 없다. 처음부터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이 되길 원한 사람은 없다. 아무런 걱정 없이, 아무런 시름없이 편안하게 한 세상 살기를 누구나 마음속으로 원했다. 열심히 일만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이란 의의도 모르면서 구멍가게를 차려놓고 대부가 되려는 꿈을 꾸며 사는 사람들, 먹고살기 위해서 온 종일 아들을 남에게 맡겨놓고 나가서 아이들이 잘 커 나기를 바라는 부모들, 선생님의 얼굴도 모르면서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잘 해 나가기를 바라는 부모들, 게으름 속에서 할 수 없이 노동력을 바치는 사람들, 거기에는 이미 시름이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


돈도 자본이 되지만 지식도 활용하면 자본이 되고 노동도 잘하면 자본이 되는데 그런 것들을 자본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희망을 헛되게 버리고 일만하고 살게 된다.
자식은 가정의 자본이다. 그 자본의 가치를 미국에서 사는 부모들은 한국에서의 부모들보다 멀리 두고 있어 아이들 돌봄이 형편없이 낮고 학교 선생님을 염두에 두는 정성이 열배는 낮다. 밥이나 먹이면 아이들의 성장이 저절로 완성이 되는 줄 안다. 먹고 살만 하면 크게 성공을 거둔 사람처럼 행세를 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아이들 앞에서 무슨 꿈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 있으며 무슨 희망을 거두었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내 일보다 남의 일에 흥미를 더하고, 내 장사보다 남의 장사에 관심을 더 갖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세상에는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불평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 배반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 인생을 보는 눈이 일관된 사람들,잊지 않고 사는 사람들, 감사 할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다.이런 사람들에게는 시름대신 깨끗한 소원이 항상 깃들여 있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 지식보다 지혜로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자본이다. 소원이 있는 한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남북통일을 국시로 요구한 한때의 소원은 우리 인생살이의 소원이 아니다.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대나 당상나무 밑에 떠 놓고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 비는 어머니들의 그 소원이 그림 같이 작아 보이지만 그런 것이 인생의 참 소원이고 계산에서 나오는 소원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적 참 소원인 것이다. 그런 소원이 우리에게 이루어 졌을까? 아직도 어디에선가 누군가 빌어주는 그 기도에 답할 수 있는 소원이 먼 미국 땅에서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게 사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