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칠흑같은 밤

2012-11-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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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칠흑(漆黑)은 옻칠처럼 검고 광택있는 것을 이른다. 이 ‘칠흑같은 밤’에 대한 추억이 있다.초등학교때 겨울방학동안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시골에 머문 적이 있다. 전기가 아직 산골까지 들어오지 않아 석유로 켜는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던 시절이었다.밤이면 서울에서 내려온 사촌, 육촌 또래들이 커다란 사랑방이 있는 집에 모여 놀았었다. 막 군불을 땐 뜨끈뜨끈한 방에 몰려 앉아서 윷놀이를 하고 그림자놀이도 하다가 밤이 이슥해지면 각자 머물고 있는 조부모나 삼촌집을 찾아 문밖을 나서면 그야말로 칠흑같은 밤이 맞아 주었다.

멀리 있는 산도, 나무도, 드문드문 있는 집들도 시커멓게 덩어리로만 보이고 낯익은 동네 길조차 발밑이 잘 안보일 정도로 더듬거리고 가야 할 정도였다. 달도 별도 모두 구름 속에 가려졌는지 밤이면 늘 어두웠고 그래도 용케 각자의 집을 찾아들 갔다.


이 칠흑같은 밤이 뉴욕에 찾아왔었다. 지난달 미 동부 일대를 뒤흔든 초강력 허리케인 샌디는 수많은 가구의 전깃불을 앗아갔다. 뉴욕시 70만, 뉴저지 90만 가구가 정전 피해를 당해 오랜기간 심각한 불편을 겪어야 했고 아직도 완전 복구가 안된 상태이다.

‘반짝’하고 전기가 들어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칠흑같은 어둠이 거짓말처럼 걷히고 사람들은 ‘이제 살 것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문명의 혜택을 받고 사는 것일까. 수십만년 된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문명을 받아들인 것은 100년이 좀 넘었을 뿐이다.

1879년 토마스 에디슨은 뉴저지주 멘로팍 연구소에서 백열전구를 발명, 현대의 전기문명을 탄생시켰다. 1882년에는 뉴욕에 처음으로 발전소를 세워 전기를 일반 가정에 보내게 되고 그이후 전세계의 도시에도 발전소가 생기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앨리스 아일랜드에 도착했고 가스등불과 마차가 달리던 시절은 이때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시골마을에 최초의 전신주가 세워지고 철도가 부설되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마이 카의 꿈을 지니게 되었고 헨리 포드가 1908년 출시한 ‘모델 T’ 자동차가 대중들의 생활방식을 바꿔놓았다. 한국에서는 문명의 이기를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대궐이었다고 한다. 1887년 고종은 경복궁에 전등을 가설케 했다.

‘경복궁의 향원정 못물에 수력 발전 시설을 하여 왕의 침전인 건청궁에 백촉광을 밝혔다. 이 수력발전의 전등은 제멋대로 커졌다 껴졌다 한 탓으로 ‘건달불’ 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민비가 죽고 고종은 아관파천 하여 있으면서 밤이면 자객을 겁내 어둠공포증이 생겼다. 그래서 일본에 발전기를 주문해서 1900년대에 완공했다. 이때 600개의 아크등을 궁중에 켜서 대낮같이 밝혀 두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덜덜불’이라는 별명이 또 생겼다고 한다.‘(이이화의 ‘민중생활 100년사’ 인용)

한국의 자동차는 1903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맞아 미국 공사 알렌을 통해 들여온 의전용 차가 처음이었다. 이번 뉴욕과 뉴저지 정전대란으로 인해 오랜만에 촛불을 켜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고 밤이면 서로 꼭 껴안고 자며 체온을 나누어 추위를 달랬다는 사람이 적잖다.

생활의 편리가 개화시대를 가져왔고 그것이 너무 편하고 익숙하여 잠시 전기를 잃자 우리는 당장 못살 것처럼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잠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한치 앞도 안보이는 어둠속에 몰아치는 강풍, 유리창 너머 흔들거리는 나무 그림자가 무서워 할머니나 어머니품을 한없이 파고든 아이들, 그들에게 칠흑같은 밤의 존재는 가족의 따스한 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 역시 칠흑같은 밤은, 호랑이와 귀신 이야기를 하고 호롱불 그림자 아래 깎아먹던 생고구마, 그 단맛이 줄줄 흐르던 생고구마의 맛과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던 평화로움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제 몸을 태워 자신은 사라져가며 주위에 불을 밝혀준 촛불의 존재, 비바람 부는 어둠 속에 혼자 버려진 듯 광활한 우주 속에 미미한 인간의 존재를 느꼈던 일을 잊지 말자. 또 이 눈부신 문명이 졸지에 암흑으로 변할 수 있고 마음 속 구석 어딘가에 전구같은 빛 하나는 켜두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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