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허리케인 재난에서 얻은 교훈

2012-11-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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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훈(사회1팀 기자)

30여 년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매드맥스’란 영화 시리즈가 있다. 당시 신인배우 멜 깁슨을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로 올린 이 영화는 석유가 고갈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석유 약탈자’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과 뉴저지 일원을 휩쓸고 지나간 후 2주간 개스 대란을 몸소 겪으며 이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실제 뉴욕의 상당수 시민들은 초대형 허리케인 앞에 자연의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난데없이 불어닥친 개스 고갈 사태에 더욱 당황해 했다. 주유소 마다 ‘No Gas’ 사인을 내걸었고 사람들은 마치 사막 속의 오아시스라도 찾듯 개스를 판매하는 주유소를 찾아 마냥 떠돌아 다녀야 했다.
문을 연 주유소 곳곳에서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폭력사태가 벌어지며 경찰에 연행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기자 역시 일찌감치 ‘빨간불’이 들어온 자동차 계기판을 바라보며 며칠간 안절부절해야 했다. 가까스로 퀸즈 플러싱의 한 주유소가 저녁께 문을 열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밤을 샐 각오로 그곳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자동차 행렬이 줄잡아 10블럭은 늘어섰는데, 설상가상으로 행렬의 꽁무니에 줄을 서자마자 차 시동이 꺼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끙끙’ 거리며 홀로 직접 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행히 내리막 길인 덕분에 차량이동이 수월했지만 얼마 안가 오르막 경사가 형성되면서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했다. 자연스레 앞차와 간격은 갈수록 점점 벌어졌고 기자 뒤로 늘어선 차량의 운전자들은 하나둘 인상을 찌푸린 채 경적 소리를 울려댔다.

진퇴양난의 순간. 차는 더 이상 밀기 힘들었고,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 설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좀 도와줬으면…’하던 순간, 바로 뒤에서 안쓰러운 눈길로 지켜보던 중년 흑인남성 운전자가 대뜸 기자에게 차에 올라타라며 손짓을 보냈다. 엉겁결에 시키는 대로 운전석에 올라타자 흑인 운전자는 자신의 차로 슬며시 기자의 차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무사히 주유소에 도착해 주유를 하고 있는 사이 뒤를 돌아보니, 그제야 맘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흑인 운전사가 보였다.이렇듯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자원고갈’ 사태를 직접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야 했다. 사태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된 지금, 돌이켜 보면 재난기간동안 주민들이 유일하게 믿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부의 대책과 지원 보다는 시민 스스로 지키는 ‘질서’와 이웃을 생각하는 ‘양보’의 정신이었다. 매스컴은 연일 개스대란의 혼란스러움과 허리케인 피해 정도를 보도하고 있지만 정작 시민들은 질서정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짧지만은 않았던 2주의 시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시민들은 단순하고 명쾌한 교훈을 얻었다. ‘질서’, ‘양보’, ‘협력’. 큰 시련이 찾아 올 때 마다 꼭 필요한 단어였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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