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풍에 고갱이만 남다

2012-11-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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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 박재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아무러한 시간의 무덤덤한 흐름 속에서도 꽃은 피고지고, 성성했던 나뭇잎들은 어느 듯 낙엽 되어 골골마다 수북하다. 가을 끝머리여서인지 해는 막무가내로 짧아졌고 햇살은 쌓인 낙엽들 위로 맥없이 떨어져 바스러진다. 골짜기를 따라 군락을 이룬 낙엽 진 활엽수들의 앙상한 가지사이로 바람이 스치자, 몇 잎 남지 않은 잎사귀들마저 속절없이 흩날린다.

이제, 높고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탈속한 성자처럼, 늘어선 나목들의 고절한 자태가 차라리 아름답다. 그만, 결실이란 간절한 가치를 향해 숨 돌릴 겨를조차 없이 불태웠던 열정을 접고, 그동안 미뤄둔 그 ‘겨를’을 누릴 긴 동면을 고대하는 듯하다.

샌타모니카 산맥을 동쪽으로 넘다 눈에 든 풍경은 늦가을이 주는 조락의 쓸쓸함과 서러움, 막연한 그리움을 한층 짙게 만드는데, 오가는 바람 또한 산산하고 소슬하긴 하나, 울창한 상록수들이 뿜어내는 청량한 기운과 향기가 도드라져 더 없이 상쾌한 느낌을 준다. 해서 가을바람을 금풍이라고 부르나 보다.


매년 이맘때면 글 쓰는 사람들의 붓끝에 자주 오르내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선가의 화두가 있다.

어느 날 공부하는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여쭈었다.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선사께서 답하셨다. “(체로금풍!) 앙상한 몸을 드러내면 가을바람만 가득하겠지”

‘체로’는 나무의 온전한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뜻이며 ‘금풍’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말한다.

그러나 앞의 선문답은 나무의 살림살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림하여 군말을 부치자면, 학승은 번뇌와 망상이 다 떨어져 나간 경지는 어떠한가를 묻고 있는 것이며, 스승은 그러하면 본래 청정한 사람의 참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고 천지엔 금풍만이 가득 남게 된다고 답한 것이다.

세상의 연기적 관계를 상징하는, ‘나무는 바람의 모습을 드러내고 파도는 달의 마음을 희롱한다’는 운치의 극에 이른 선시가 말해주듯, 스승의 죽비인 금풍이 불어 제자들의 번뇌 망상을 털어내면, 금풍의 모습을 드러낸 해탈한 나목들이 천지에 즐비하게 된다는 의미를 절묘한 시적 은유와 함의를 담아 그려내고 있다.

섭리에 순응하는 자연의 변화하는 현상을 빌려, 선의 핵심적인 선지를 주고받은 사제 간의 깊은 선기와 낭만이 따뜻하고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명예와 권력, 재욕과 감각적 쾌락이라는 달콤한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게 마련이다.


그러나 보다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만족 너머의 만족, 여분 너머의 여분을 위해 한없이 거머쥐고 쌓으려는 조절 불능의 욕망을 미련 없이 버려볼 일이다. 사실 모자람 없이 비우면 자연스럽게 채워지게 마련이고 비워야만 채워진다.
무릇, 공부를 지어간다는 것도 그러한 욕망과 충족의 과정에 따르는 이기와 배척, 갈등과 번민, 위선과 허위 같은 번뇌와 미혹을 털어내고 종국엔 ‘자기’마저 버림으로써, 자신의 청정무구한 참모습을 드러내고자 힘쓰는 일이다.

그리하여 금풍에 고갱이로 남은 적나라한 마음이 되면,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무엇에 걸려 넘어질 일도, 무엇을 두려워할 일도 없게 될 것이며, 세상을 마음껏 다루고 당당하게 즐길 호쾌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여물어가는 가을, 금풍은 불어불어 초라한 몸이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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