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밀과 가라지

2012-11-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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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인의 신앙

▶ 김재동 <가톨릭 종신부제>

이 세상을 표현하는 말 중에 ‘밀과 가라지’보다 더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 때문인지 제 할 일 열심히 하면서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머리처럼 남에게 달라붙어 악착같이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한국에서는 ‘괘씸죄’라는 것이 헌법 위에 군림한 적이 있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면 그걸로 끝장이 났다. 권력에 빌붙어 사는 하수인들이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조건 중앙정보부로 데려가서 고문부터 하는 세상이었다.


언젠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자이언트’라는 연속극을 보면 그 당시 중정의 고문이 얼마나 잔인하고 지독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2대 도시 부산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던 대기업 ‘국제그룹’이 괘씸죄에 걸려 한 순간에 공중분해 돼 버렸다. ‘알아서 기지 못한 죄’ 때문에 당한 억울함이었다.

억울한 일을 들출 것 같으면, 우리 삶 주변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가진 것 없는 민초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거지들 사회에서조차 밥그릇 하나 때문에 매 맞고 빼앗기는 억울한 경우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모양이다. 이러니 종종 들리는 것이 “하느님! 정말 이것을 보고만 계실 작정이십니까?” 하는 한숨 어린 원망이다.

한국이 근대화되기 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가 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 밀과 보리밭이었다. 시골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 근교에만 나가도 밀과 보리가 파릇파릇 싹을 내며 자라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밀 사이로 키가 무성하게 자라는 ‘가라지’가 보였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런데 이 가라지라는 놈은 어릴 적엔 밀과 생김새가 비슷해서 쉽게 구별이 가지 않는다. 웬만큼 자라 열매를 맺을 때쯤이면 확연이 구분이 되지만 이미 그때는 뿌리가 많이 뻗어나가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 물론 뽑아낼 수야 있겠지만 뽑다 보면 주위의 밀도 뽑히고 발에 밟혀 밀밭도 엉망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자연 밀과 보리가 누렇게 익어 추수할 때까지 농부는 보고도 못 본 척 손을 놓고 지낸다. 이것이 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이다. 그래서 세상을 내신 예수님도 “왜 악인들을 못 보신 척 두고만 보고 계시냐”고 따지는 인간들에게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 아닌가.

악인이 천벌을 받지 않은 채 잘(?) 사는 것을 보면 납득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런 나머지 “하느님이 어디 있어!”라고 조롱하며 악인들을 오히려 능력 있는 자들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한 번 살다 가는 세상,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유혹에 빠져 ‘가라지’가 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늘의 천사를 보내 가라지는 단으로 거두어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결국 억울하겠지만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분명코 “아직은 다 끝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결코 우리의 ‘본향’이 아니라는 말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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