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제는 소박한 꿈을 향해

2012-10-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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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윤실 호루라기

▶ 송병주 목사 <선한청지기교회>

23세부터 전도사 생활을 시작해서 43세에 되어 담임목사가 되기까지 20년의 세월을 오직 ‘위대한 비전’이라는 구호 아래 교회성장 드라이브의 젊은 피로서 살아습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던 젊은 부교역자들은 성장 신화의 첨병이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담임목사가 되어 “이건 아니다”하고 선언하고 돌아서 보지만, 보고 배우고 들은 것이 그것 밖에 없는 참으로 어정쩡한 모습입니다. 성장신화로 들어가자니 그럴 수 없고, 돌아서자니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는…. 요즘 말로 40대 목사의 ‘멘붕’이라고나 할까요.

이와 같은 때에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들이 차려준 밥을 얻어 먹고, 가족 중 아픈 자가 없는지 물어본 후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소박한 이 순서가 참 좋습니다.


‘밥상 공동체’를 먼저 이루고 ‘고통 분담체’가 된 후 ‘비전 공동체’가 되라는 것! 위대한 비전은 소박한 꿈부터 출발했습니다. 같이 밥 먹고, 같이 아파하고, 그리고 비전을 이루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위대한 일에 심취해 이 소박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메시야를 통해 위대한 이스라엘을 꿈꾸던 이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위대한 예수를 기대하던 제자들이 예수를 팔았습니다. 위대한 예수 덕에 한 자리 할 줄 알았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습니다. 십자가 좌편과 우편에는, 영광스런 예수님의 보좌 좌편과 우편에 앉으려고 서로 싸우던 제자들의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강도들만 달려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위대한 것을 좋아하던 분들이 문제였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세계 10대 교회 중 7개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그 교회들이 ‘세계적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가장 세속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한 영혼을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 낭비입니다. 하지만, 한 영혼 속에서 우주의 가치를 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큰 의미가 됩니다. 테레사 수녀는 노벨상을 받겠다는 위대한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위대한 치유의 능력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죽어가는 영혼이 사람답게 죽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예수님 대하듯 했습니다. 세상은 그녀의 위대한 능력과 비전에 감동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꿈에 감동한 것입니다.

심판날에 하나님은 목사들에게 얼마나 ‘위대한 사역’을 했는지 묻지 않으시고 ‘지극히 작은 예수님의 형제’ 하나에게 무엇을 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진정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은 ‘한 영혼’을 품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목회자들이여, 이제는 ‘국민목사’ 하지 말고, ‘동네 목사’ 합시다. 캔 커피 사들고 슬리퍼 신고 만날 수 있는 목회 합시다. 이제는 예수님의 소박한 목양 순서로 돌아갑시다.

세상에 제일 불쌍한 목사는 큰 사명 못 이룬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미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같이 못 먹어 본 사람입니다. 바쁘게 뛰는 목사에게 “너, 나랑 밥은 같이 먹어 봤냐?”라고 주님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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