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맛있는 짜장면

2012-10-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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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하는 삶

▶ 김범수 <치과의사>

‘무엇을 먹는가’가 그 사람의 성격과 습성과 삶의 행태를 말해 준다면 ‘무엇을 못 먹는가’ 역시 그 사람을 파악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이를 못 먹는다. 누나들이 오이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 누워 있는 것을 본 후로 오이는 나에게 마사지용 재료이지 음식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또한 젓갈을 못 먹는다. 하얀 쌀밥 위에 잘 삭은 젓갈을 한 점씩 놓으면 입맛이 살아난다고 권하는 어른들께는 ‘그러지 않아도 입맛이 너무 좋아서 문젭니다!’ 하고 슬그머니 거절을 한다. 한때는 싱싱한 바다에 펄펄 살아 다녔을 재료들이 밥상 위에 흐물흐물한 형태로 누워 있는 것이 시각적으로 좀 친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대신 짜장면을 좋아한다. 열두 살, 고달픈 인생살이의 첫 관문인 중학 입시에 붙었다고 부모님이 데려가신 곳은 광화문 근처 조그만 중국집이었다. 생일에나 한 점 얻어먹어본 탕수육을 접시 째로 앞에 놓아 주며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거저 많이 묵고 공부 잘 하라우.” 많이 먹는 것과 공부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어머님은 연신 탕수육을 내 숟갈에 올려주셨으나 나는 그 옆의 짜장면이 불어 가는 게 그리 아까울 수가 없었다.


학창시절 내내 짜장면은 우리들의 가장 사랑 받는 메뉴였다. 값싸고, 빨리 나오고, 양이 많고, 게다가 맛까지 ‘띵호와!’가 아닌가. 짜장면을 친구들의 무자비한 젓가락 공격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짜장면 그릇에 장난삼아 ‘퉤퉤퉤’를 하기도 하고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비듬 터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사랑스런 짜장면!

중국과 한국의 음식 문화를 제대로 소개한 책 ‘짜장면뎐’을 재미있게 읽었다. 음식 문화를 통하여 양국 간의 교류역사와 근대 및 현대 생활사를 서사적 풍경화로 그려내고 있는 책이다. ‘상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은 늘 오해와 편견으로 이어진다. 중국에는 짜장면이 없다거나 심지어 짜장면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발명품이며 세계 최초로 짜장면을 만든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이라는 식의 주장은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한 시절의 해프닝에 불과하다.’(p.121)

저자가 지적한 대로 짜장면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사랑을 증명해 보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부끄러울 게 없다. 러시아로, 남미로, 멀리 단기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지친 팀원들과 함께 중국음식점을 찾곤 하니까 말이다.

지구촌 어디나 중국집이 없는 곳은 없으니까. 현지어와 한자로 적힌 메뉴판을 훑어보며 ‘짜장면’에 가장 비슷한 단어를 열심히 골라본다. 한 번은 아프리카 어느 허름한 도시에서 먼지 낀 중국집 간판을 발견했다. “여기 짜장면 있습니까?” 종업원 겸 주인 겸 주방장인 게으른 사나이가 졸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 만에 일행 앞에 무슨 음식을 날라 왔다. 이빨 빠진 사기 그릇 안에는 쪄낸 밀전병 위에 질기디 질긴 얼룩말고기와 악어고기가 검은색 소스에 버무려져 얹혀 있었다. 이 정도 음식도 감사히 먹을 수 있다면 짜장면을 향한 일편단심이 증명되지 않겠는가.

현지인들의 음식을 어울려 함께 먹지 못한다면 선교 갈 자격이 없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단기 선교를 앞두고 짐을 꾸리는 요즈음, 가방 한편에 챙겨 넣은 라면과 고추장을 빼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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