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북한 동족에 대한 생각의 흐름

2012-09-2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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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사람은 자기 삶이라 할지라도 장래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지나 온 생애를 더듬어 보면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만나 흐름이 바뀌게 되기도 합니다.

필자가 북한 고아를 돌보도록 116개의 미주 재림교회 연합체의 심부름을 하게 된 것도 전생에 인연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도 아니고, 북한 땅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전체 인민 평등사상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공산주의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 제가 북한 고아 돕기에 심부름꾼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 일로 북한을 드나들게 되면서 북한 동족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이질적인 관습에 많이 놀라고 어색했습니다. 첫 북한 방문지가 함경북도 청진이었습니다. 그 첫날 저녁, 관계자들이 나와서 저녁식사를 같이 했는데 식사 후 나에게 식사비를 계산해 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손님격인 나에게, 그것도 자기들을 돕겠다고 들어간 사람에게 식사비를 지불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습니다.


후에 고아 지원에 어려움이 있어 이를 개선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 금방 얼굴색을 바꾸면서 “안 도와 주어도 좋다, 그러니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대답을 듣는다든지, 혹은 “우리에게는 우리식이 있습네다” 하는 말을 들을 때 돕고 싶은 마음에 두 번 세 번 상처를 입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첫 손님을 대접하는 그 잘 차려진 식사의 비용을 지불할 만한 재정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유재산이나 세금이 없는 북한에서 모든 예산은 중앙부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200만이 굶어죽는 나라에서 재정이 제대로 지급될 리가 없었고 따라서 식사비를 지불할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심은 대단해서 걸핏하면 “우리가 언제 당신네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습네까?”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구걸은 하지 않는다는 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그들이 이상했지만 차츰 그런 그들에게 연민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일선 관리들과, 어쩌다가 만나는 북한 주민들은 퍽이나 순수해 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은 평양에 가서 대접을 받기도 하는데,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도와주러 왔으면서 오히려 신세를 지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고아들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열악한 시설에서 사는 지저분한 옷을 입은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지 만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린 고아들 사이에 주저앉아서 그들을 안아주기도 하고 또 그들이 내 어깨에 기어오르기도 합니다. 이들이 남의 아이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마치 내 손주처럼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고픔과 헐벗음에 목이 메이곤 합니다.

지난 8월 초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중국으로 출장 나온 북한 관리였습니다. 그는 지난 7월 북한의 집중호우와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이 20만이 넘는다면서 구호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돈을 쌓아놓고 있는 게 아니라서 즉각 돕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벌써 그들의 겨울을 지내도록 담요와 내복이라도 보내야 하는데 하는 걱정으로 자던 잠이 깨곤 합니다. 이런 게 동족애이고, 이런 게 핏줄이라는 것일까요? 요즘은 그 때 묻은 고아들, 안으면 지린내가 나는 고아들이 문득 문득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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