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2012-09-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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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한갓진 여느 길을 한가로이 걷거나, 산에 들어 산길을 따르다보면 눈길이 닿는 곳마다 여러 형색으로, 저마다 빼어난 자태를 다투며 피어 있는 꽃들이 자주 발길을 더디게 한다. 때로 생각은 괜한 분별로 이어져 내밀한 꽃들의 속내까지를 헤아려 보게 된다.

꽃이 ‘꽃이 되는 건’ 다소 메마른 군소리가 되겠지만, 언젠가 도래할 자신의 부재가 두려운 초목들이, ‘나’의 존속과 그를 증거하기 위한 본능적인 갈망의 표출로써 일종의 숭고한 생명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살피게 되면, 꽃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간 겪었을 외로운 노고를, 가끔은 죽음과도 맞닿은 경계를 ‘흔들리며’ 극복한 그 간난을, 무디게나마 어림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꽃들은 죽을 힘을 다해 ‘된’ 것이겠다. 그래서 그만큼이나 턱없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다 이루었노라’며 미련 없이 스러져가는 꽃들을 보면 어째 애틋하고도 장엄하다.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뭇가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 줄 때도/ 사실은/ 참 아픈 거래//이 세상에 아픈 것들이 참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고/……’(이해인 수녀의 시 ‘꽃이 되는 건’ 중에서)

어디 꽃뿐이겠는가. 살아 있는 뭇 생명들은 다 꽃과 같은 꿈과 고통과 나름의 색깔로 발현될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자신만의 사무친 열정과 고통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생명들이 각자 아름다운 색깔로 드러날 이면에는, 이바지할 빛의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색은 빛의 고통”이라고, 빛의 속성을 그렇게 규명했는지도 모른다.

빛은 자신의 색깔을 지니지 않은 무색으로, 무색은 침묵의 색이며 자신을 비운 공적(空寂)의 색이다.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찬란한 색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을 비운 희생과 고통을 바탕으로, 만물이란 인연을 만나 기꺼이 그에 합당한 색이 된다. 비었기에 무슨 색으로든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빛은 세상을 아름다운 색의 향연이 되게 하는 원초적인 에너지며 자비의 원천이다.

꽃과 빛, 그와 같아서 사람이 참 사람이 되는 건 고통이며 아름다움이다. 참 사람 즉 진인(眞人)은 진리를 진리 ‘되게’ 하는 사람이며, ‘따로 또 함께’라는 진리를 사는 사람이다. 그것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기적인 ‘나’를 포기하고 감각적 쾌락에 전도된 탐닉 등, 마음의 부정적인 에너지들에 대한 내적 정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빛이 되어 나와 타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헌신할 토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실로 고통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통은 지고의 가치로 승화되어 지순한 아름다움이 된다.

한동안 ‘꽃보다 사람’이라는 말이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지만,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참 사람뿐일 터이다.

요컨대 참사람이 되는 고귀한 행사는 지난한 일이지만, 자신이 공적의 색인 빛이 되어 나와 남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기어이 아름다운 꽃이 되게 하는 구원의 길이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불후의 명작 ‘죄와 벌’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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