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둘레햄

2012-09-05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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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하는 삶

▶ 김 범 수 <치과의사>

“뚱뚱한 사람은 인생 낙오자다”라고 세상 미디어들이 우리를 세뇌시킨다. 환자 대기실에 배달되는 미국 패션잡지를 보니 어여쁜 여자 모델들은 죄다 말라깽이다. 남성용 패션지의 젊은 청년들은 잡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반짝거리는 그을린 피부와 단련된 근육으로 독자들의 기를 죽인다.

잡지를 팽개치고 진료실을 돌아 내 방으로 들어온다. 한인타운 한복판 3층.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창문 아래로 행인들이 바삐 지나다니는 것을 본다. 위에서 내려다보아 그런지 다들 키가 작다. 잡지에 실렸던 콩나물처럼 잘 자란 말라깽이들은 안 보이고 남자들도 근육은커녕 하나같이 두리뭉술! 어깨는 앞으로 휘고 배도 나왔다. 반바지 입은 종아리 아래에는 고된 노동으로 잡힌 알통이 불룩할 뿐이다. 걸어가는 여자들 역시 헤비급이다. 배와 가슴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체격과 상관없이 꽉 조인 스키니 청바지를 입었는지 발랐는지 하체의 실루엣도 제멋대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려낸 황금비율은 결국 잡지 사진 속에서나 가능할까? 그가 말한 황금비는 실제로 사람의 배꼽을 기준점으로 해서 손가락과 손바닥, 발바닥과 머리, 코의 크기, 양쪽 귀 등을 측정하고 이를 수학적으로 계산한 다음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라는 유명한 인체도를 그려낸 것이 아닌가. 1:1.6 이라는 비율. 이것이 고대 그리스 시대로부터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최고의 미적 조건이 된다는 이야기다.


미디어가 우리에게 강제로 주입시킨 이상형 미남, 미녀들의 체격은 이보다 훨씬 드러매틱하다. 지난 달, 미 전역에서 동시에 열린 ‘여성도 상의를 벗고 다닐 권리주장 궐기행진’ 에 참가한 여성들의 반라 모습을 얼핏 TV에서 보았다. 플래카드를 들고 앞장 선 여성들은 거의가 카메라 기자들로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는다.

이 행진에 즈음해서 아티클이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그 의견들을 종합하면 대개 이런 내용이다. 즉, ‘여성들은 미디어가 조작해낸 완전한 미의 조건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외모에 열등감을 안고 있다. 이들이 상의를 벗지 못하는 이유는 남녀불평등한 사회적 억압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열등감 때문이다’라는 주장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의견을 덧붙일 마음은 없으나 미디어가 꾸며낸 21세기적 인체 황금률은 허상이라는데 동의한다.

나 역시 ‘배둘레햄’을 빼는 것이 늘 목표에 들어 있지만 잘 안 된다. 한 번은 독한 마음을 먹고 다이어트 플랜에 도전했다. 4주 코스인가 하는 이 무시무시한 프로그램은 일체의 곡기를 끊고 무슨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는 것으로 시작됐다. 계란 후라이와 노란 버터 바른 빵, 지글지글 맛있게 구운 베이컨으로 시작되던 아침 대신 멀건 미숫가루 같은 드링크 한 컵, 간호사들과 즐겁게 나누던 한식당의 푸짐한 런치메뉴 대신 무슨 알약 두 세알, 퇴근한 뒤에도 기나긴 저녁시간 동안 고작 맛없는 초록색 물 반 컵….

극기 훈련 일주일째에 접어들자 타겟 삼았던 ‘배둘레햄’이 빠지는 대신 서서히 내 인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환자들이 무엇을 물어도 자세히 설명할 기운도 없고 간호사들이 옮기는 최신 유머에도 웃을 마음이 안 든다. “선생님, 차라리 다이어트 그만 하시면 안돼요?” 보다 못한 주변의 권유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즐거이 세속으로 귀환했다. 신경질적인 말라깽이보다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잘 웃는, ‘배둘레햄’의 내가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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