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새벽은 언제 오는가

2012-06-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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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옛날과 달리 요즈음 세상은 ‘이웃’을 잃어버리고 살기 딱 좋게 되어 있다.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에게 연락하며 살다보면, 웬만큼 가까운 사람 아니면 얼굴 대하기가 무척 힘든 세상이다.

얼마 전 집 근처 홈 디포에 가서 꽃 몇 포기를 사가지고 나오다 부끄러운 일을 겪었다. 대여섯 명이 저마다 카트에 물건을 싣고 줄을 서 있는데, 바로 내 앞의 중년 미국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반갑게 알은체를 하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반가운 척 ‘hi’ 하면서 미소를 보냈지만 그가 누구인지 도통 생각이 안 났다.

귀가해 집앞 화단에 꽃을 심고 있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Good job! That’s very nice!’ 한다. 뒤돌아보니, 조금 전 바로 내 앞에 서 있던 그였다. 알고 보니 바로 한 집 건너의 ‘이웃’ 사람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5년 이상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한두 번 먼발치로 ‘hi’만 하며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살다 보니, 그동안 그는 나에게 ‘먼’ 낯선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자기 옆집에서 혼자 사는 이웃이 심장마비로 죽어 시체가 썩어 가는데도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도 몰랐다는 신문기사가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새벽은 언제 오는가” 하고 물었다. 그때 제자 하나가 ‘저 멀리 한 동물이 있는데 그 짐승이 양인지, 개인지, 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고 답했다. 랍비는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가 무화과나무인지, 배나무인지 알아볼 수 있는 시간 아닐까요?” 라고 되물었다. 랍비가 이번에도 “아니다”며 고개를 젓자, 나머지 제자들은 궁금해 하며 “스승님, 그러면 도대체 새벽은 언제 옵니까”고 질문했다. 그러자 랍비는 “너희가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가 너희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가 바로 새벽이다”라고 답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심으로 스스로 이웃과 단단한 담을 쌓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통된 고뇌는 그래서 ‘불안’과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과 불안을 잊기 위해 현대인들은 무엇인가에 몰두하면서 각자 ‘중독’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어디 술과 마약만이 중독이겠는가. 권력과 명예, 물질과 환락에 대한 집착, 심지어 정신없이 몰입하는 일중독, 끝 간 데 모르는 서우치욕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눈길조차 줄 틈이 없도록 만들어가는 ‘중독’들 아니겠는가!

그래서였을까.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엔은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양로원에 가서 노인, 정신박약자들의 대소변을 받고 더러운 발을 씻기며 살다 갔다. 그분이 남기고 간 “높은 자리에서 만날 수 없었던 주님을 낮은 데에 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었을까.

길거리에 버려진 영아들을 돌보며 살다 가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기자들이 사랑의선교회 ‘성공’ 비결을 묻자 빙그레 미소 지으면서 “저는 하느님으로부터 ‘성공’의 임무가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받았을 뿐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높이 올라가는 것만을 성공으로 여기며 많이 가지는 것만을 삶의 목표로 여기는 현대사회의 왜곡된 가치관에 목을 매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눈에 잃어버린 ‘이웃’과 ‘형제’들이 보이는 새벽은 언제나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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