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무도 말을 할까

2012-06-1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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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범 수 <치과의사>

내가 처음부터 달팽이를 미워한 것은 아니다.

창세기 시절, 암수 한 쌍씩 노아의 방주로 들어갈 때, 달팽이는 앞서 달려가는 얼룩말 커플을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껑충껑충 뛰는 얼룩말까지 갈 것도 없다. 시대 및 장소 배경을 옮겨 오늘날 우리 동네 녹지대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잽싼 다람쥐를 얼마나 부러워했겠는가 말이다. 불쌍한 느림뱅이, 그러나 나는 지금 달팽이를 미워한다.

우리 집에는 예쁜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다. 겨울에는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서, ‘아니, 죽었나?’ 하고 들여다보지만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어느새 파란 싹들이 올라온다. 작은 잎새들은 무작정 파랗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붉은 기운이 가장자리에 묻어 있다.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면서는 꽃뿌리 쪽으로 동그랗고 탱탱한 열매들이 맺힌다.


아침, 저녁 나가 본다. 기특해라. 내가 도대체 무얼 했다고. 그것도 아무 열매로나 생기지 않고 자신이 석류인 것을 어찌 알고 석류 모양으로 자라가느냐? 지난 가을에는 탐스럽게 익어 쩍! 벌어진 열매 대부분을 까마귀와 다람쥐에게 강탈당했다. 나쁜 녀석들! 붉디붉게 익어 땅에 선 채로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석류들이, 아침에 나갔다가 집에 와보면 어느새 마른 껍질만 남아 있곤 하였다. 눈에 다람쥐가 보이는 대로 달려가 쫓아도 소용이 없다. 집안에서 키우는 개를 내보내면서 “저 못된 다람쥐 잡아랏!” 했더니 게을러터진 개가 어슬렁어슬렁 나갔다가 다람쥐를 보고는 기겁을 해서 집으로 돌아 들어온다.

올해는 여기에 달팽이가 가세를 했다. 아침 이슬에 젖은 작은 열매들을 보러 나갔다가 발밑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내려다보니 엄청나게 많은 달팽이 부대가 석류나무 뿌리 쪽에 엎드려서 여린 잎새들을 갉아먹고 있다. 달팽이가 느리다고 누가 그랬나? 단체로 붙어서 연녹색 잎사귀 먹는 소리가 거의 귀에 들릴 지경이다. 음흉한 달팽이들 같으니라고!

나는 다시 나무에게 물었다. “너는 그래도 가만히 있기만 하느냐? 너에게는 반항이 없느냐? 햇볕이 뜨거워도, 목이 말라도 그저 가만히 있느냐? 가만히 있는 것과 그러다가 죽어버리는 것이 네가 하는 저항이냐?”

내 질문에 멘델 이후 최고의 식물학자로 꼽히는 뷰너 박사는 이렇게 답한다. ‘식물은 화학물질을 내뿜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얼마 전 뉴질랜드 농장지대의 양들이 집단으로 불임에 걸렸는데 조사 결과, 콩과 클로버잎을 과다섭취할 때에 식물에 함유된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젠이 양들의 임신을 방해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식물 자신은 먹힘으로 희생이 되지만 자신을 죽인 가축에게 홀몬을 먹여 2세 생산력을 낮추는 작용을 하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후손은 가축으로부터 침략 당하지 않도록 고도의 자기방어 시스템을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커피 열매가 딱정벌레에게 불임을 일으키거나, 홍차나무가 태닌 성분으로 곤충들의 장을 파괴하는 것도 ‘식물의 반항’이다.

나무는 절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도망가지도 않는다. 최후의 저항은 죽음이다. 대나무가 생장조건이 극도로 맞지 않을 때 꽃을 피운 다음 죽어버리는 것, 이것이 나무의 ‘말’이다. 우리 집 석류나무는 과묵하다. 소리 없이 견딘다. 차라리 죽을 정도로, 무섭도록 묵묵한 그 견딤을 나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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