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앙중독의 해악

2012-06-0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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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 중독증세가 있을까? 물론이다. 구약 왕정시대 전에 성막을 섬겼던 엘리 제사장이 있었다. 오랫동안 성막에서 제사를 담당한 사람이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제사에는 항상 새로운 마음, 정결한 마음이 요구된다. 구태의연한 자세는 가증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같은 짐승을 잡아 제사하더라도 마음은 늘 새로워야 하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제사법이다. 어느 순간 이들의 제사에 새로운 마음과 정성이 빠져버렸다. 그의 뒤를 이어 제사를 책임진 두 아들은 제사장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을 제대도 받지 못했다. “네 아들들을 나(여호와)보다 더 중히 여겨…” 아버지의 실수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원인이 되었다. 단순한 실수로 한두 번 정도 아들을 여호와보다 더 중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백성들은 가장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렸으나 그 좋은 것으로 자기들의 배만 불리고 말았다. 제사에 습관은 독약과 같다. 오늘날의 예배는 어떤가! 습관과 형식에 얽매인 예배가 반복되는 것을 느낀다. 습관은 무서운 질병이다. 잘못된 습관은 쉽게 오염된다. 그것은 곧 중독증세로 발전한다.

어느 유명정치 목사가 정치하느라 너무 바빠 설교 준비를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다. 부교역자가 알아서 설교 제목과 본문을 정하여 주보를 만들었다. 헐레벌떡 주일 아침 교회에 와서야 설교 본문과 제목을 확인한다. 예배 전 잠시 묵상하는 중에 설교를 구상하여 설교를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그날 설교가 정말 히트(?)친 설교였다. 은혜 받았다고 다들 칭찬한다. 천부적인 언어 구사력과 오랜 목회경험을 토대로 꾸며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설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날 받은 은혜가 진짜 은혜일까.


이웃 교회와의 경쟁에 뒤쳐지면 안 되는 오늘의 교회에서 흔히들 찾을 수 있는 현실이다. 교인들도 예배가 의미하는 신선한 이유를 모른 채 의식에 빠지기 쉽다. 찬양대와 예배위원도 신령과 진정을 모을 여유조차 상실한 체 예배를 구경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교회 예배가 성전 예배와 같은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면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습관적인 예배를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하나님보다는 교인들이 재미 보며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 모든 특권을 목사가 독차지한다면 가증한 제사와 무엇이 다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여호와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의 예배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세밀하게 보시고 받으신다고 한다. 몸은 교회에 있으나 마음은 세상에 있다. 그 사이 예배는 끝난다.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 예배가 된 것 같다. 십일조 잘 내고 교회 봉사에 빠지지 않으면 일등교인으로 인정받는다. 신앙중독은 교회를 무기력하게 할뿐 아니라 영적인 눈을 어둡게 만든다. 세상을 향해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회는 빈 깡통에 불과하다. 소리만 요란하나 속이 텅 빈 교회. 나는 텅 빈 교회 목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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