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를 ‘구어드’라고 부른다. 구어드는 호리병처럼 목 부분이 호리하여 좁은 반면 몸통은 불룩해서 속이 넓다.
원주민들은 이 구어드 병들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땅콩을 넣고, 원숭이들이 잘 다니는 길목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둔다. 그리고 며칠 후 가보면 원숭이들이 한 손을 구어드 안에 집어넣은 채 널브러져 있어, 줍듯이 원숭이를 잡는다고 한다.
원숭이의 어리석은 탐욕을 이용한 기발한 사냥법이다. 그러니까 대개 어른 원숭이들은 어느 정도 지각이 있어 그 함정을 피해가기도 하지만, 아직 지각이 덜 여문 어린 원숭이들은 땅콩을 보자마자 손을 넣어 움켜지게 된다. 그러나 구어드의 들목이 손을 펴면 빠져도 움켜진 손은 뺄 수 없을 만큼 좁다. 웬만한 소견머리로야 땅콩을 포기하겠지만, 원숭이는 끝내 땅콩을 놓지 않아 목숨까지 잃는 비극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런 원숭이를 비웃고 그냥 넘길 일만은 아니다. 인간들도 얼추 그와 같아, 성경에서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 말씀은 탐욕이란 채워도 항상 모자라는 속성이 있기에, 한번 그 덫에 걸리면 윤리와 법, 분수와 본분은 나중이 되며, 더 달달한 그 너머의 것을 탐하게 되어, 종국엔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엄중한 채찍이다.
지금은 참회니 결사니 승풍 쇄신이니 해서 뒤늦게나마 야단법석이니 다행이긴 하지만, 한동안 한국의 불교계 대표적인 조계종단, 그것도 지도자급 승려들과 관련된 도박과 도촬, 풀코스 룸살롱, 17년산 발렌타인과 성 매수, 은처승과 성폭행, 축재 등 사실여부를 떠나, 낯 뜨겁고 참담한 용어들이 매스컴에 무차별로 난무했다. 그로 해서 올곧은 스님들과 그들을 믿고 의지했던 신도들은 물론, 불교에 호응한 많은 국민들을 배신감과 절망감에 빠져들게 했다.
이즈음 ‘사자 몸속의 사자벌레’에 대한 비유를 절절히 되새기게 된다. 백수의 제왕인 사자가 늙어도 그 위용이 유지되어 외부의 적에 의해 목숨을 잃지는 않지만, 자신의 몸속에 있는 작은 벌레에게 몸을 빼앗기면서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개인과 공동체를 괴멸시키는 치명적인 동인이 주로 내부에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이번에 불거진 사태는 일부 승려들의 ‘막가파식’ 탐욕과 그 달디 단 감각적 욕망에 전도된 탐닉 때문이다. 그들은 출가자의 쓰디쓴(?) 본분과 지고의 가치를 저버리고, 일찍이 고결한 수행자이기를 포기하고 권력과 재물로 눈을 돌린, 무자비한 이기심의 소유자들이다.
앞으로도 그 원숭이들처럼 탐욕의 덫에 걸린 사이비 승려들이 득세하고 행세하는 한, 불교의 미래는 암담하다.
그러나 다행히(?) 넘어져 비로소 본 바도 있을 것이니, 이제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아니, 넘어졌으니 일어설 일밖에 없을 터. 똥바가지 뒤집어 쓴 그 자리는, 에라! 넘어진 김에 잠시 쉬었다갈 그런 자리가 아니라, 거듭날 자리이다.
탐욕의 근원은 상생의 미덕을 외면하고, 나와 나의 것만을 위한 이기배타적인 심보에 있다. 모두가 ‘내 큰 탓이’다. 사자벌레의 비유처럼 적은 밖에 있지 않았다. 나,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생명력까지 앗아가는 목숨앗이인 천적,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조병화의 시 ‘천적’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