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많이 생깁니다. 과거 보호감호법이라는 어두운 시대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였던 그의 절규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통하는 것은 아직도 법은 평등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가장 공정해야 할 법을 지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연루된 스폰서 의혹,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빨대 플레이, 기소청탁 등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연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가?’ 하는 질문을 생각나게 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면 “봐 주기식 아닙니까?” 혹은 정반대로 “검찰 권력의 남용이 아닙니까?” 하는 질문이 넘쳐 흐릅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법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법대로 했다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는 봐주기 식이고, 누군가에게는 남용되었다는 체감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럴때 언필칭 “법대로 했다”는 말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법의 ‘관용성’이 최대한 적용되고, 누군가에겐 법의 ‘엄격성’이 최대한 적용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법은 관용성과 아울러 엄격성을 갖습니다. 법에는 이 두 가지가 당연히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관용성이 비상식적으로 항상 적용되는 대상이 있고, 엄격성이 비상식적으로 항상 적용되는 그룹이 따로 있다면 “법대로 했다”는 말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과 원칙대로 했다고 발표하는 소위 자신들은 ‘소통’이라고 말하는 ‘호통’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누군가는 엄격성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는 관용성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그 누군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궁금할 뿐입니다.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렸습니다. 정확한 저울과 날카로운 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봐가며 저울질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최근 한국 상황을 보면서, 디케에게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저울과 칼의 품질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의 정의의 여신은 ‘안대’를 풀어 던졌을 뿐, 그래서 보이는 눈으로 사람 봐 가며 칼을 휘두르고 있을 뿐입니다.
법대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 봐가며 법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위 현장에서 한 여인이 울부짖었습니다. “약자를 보호 안 해줘도 좋으니 제발 평등하기만이라도 해 보세요!” 디케의 저울과 칼의 품질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 안대부터 다시 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법대로 했겠지” 하는 쓴 웃음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