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로 ‘지금’ 이다

2011-12-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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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속의 부처

한동안 마음살이가 난잡한 거미줄에 엉켜, 그로 뒤척이는 것이 심히 거북했다. 일탈을 엿보다 겨우 날 틈새를 틈타 날름 나선 걸음이었다. 세상의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히 살던 ‘나’ 밖으로, 한 발자국 나서니 뜨락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었다. 서로 순응하며, 한편으론 제 뜻대로 참하게 사는 해방공간이었다.

시에라네바다, ‘백설이 만건곤’한 첩첩한 산들의 연봉은 그새 서편으로 비켜선 햇살을 비스듬히 받아, 눈부시게 웅혼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고고하게 세운 황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연봉은 한사코 나를 앞섰다. 잠시 그 장엄에 취했던 몽롱한 눈맛을 거두자 마음은 비로소 심심해졌다. 또 한 시절이 어김없이 지고 만다. 두고 갈 것은 무엇이며 가지고 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 시절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또한 무엇인가. 혜능 선사는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 것,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 것”이라고 했다는데….

안기면 포근하여 새록새록 마음 가는 시골 읍내가 비숍이다. 그 동녘에 새치름히 떠 있는 샛별을 업고 산문을 들어섰다. 눈이 싸하게 아리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신령하고 호연한 기상이 서린 바위산들이 버티고 있었다. 어둑새벽이 꼬물거릴 즈음에는 푸르스름한 빛이 돌던 산머리의 흰 눈이, 해가 움트기 시작하자 아침놀에 벌그스름하게 물들어 갔다.


날개를 펼쳐 막 비상하는 대붕의 형상을 한 주산의 턱밑은 깎아지른 천길 암벽이었고, 그 아래로 빙하가 흘러내린 길을 따라 쌓인 눈은, 살이 발라져 허옇게 뼈만 남은 고사목들 사이로 길게 늘어져, 하늘 아래 첫 번째 호수와 닿아 있었다.

산자락을 감아 오르니 애스펜(사시나무)의 군락이 도열해 있다. 한 차례 세찬 바람이 일자 여태껏 군데군데 매달려 있던, 때 놓친 마른 잎들이 사시나무 떨듯(?) 떤다. 힘에 부치는지 그만 세상 인연의 끈을 우수수 놓고 만다.

쌓인 눈 위로 간간이 산짐승들이 건너간 흔적만이 보이는 산길을, 지르밟다 멈추고 숨을 고르는데,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골짜기의 은근한 물소리와, 이따금 기척을 주려는 듯 산새들의 앙증맞고 낭랑한 지저귐이 간질간질하다. 이 속티 없는 맑은 풍경이 주는 화음이, 참으로 정답고 고마울 따름이다.

아름드리 침엽수들에 둘러싸인 락크릭 호수는 산과 나무와 구름을 품에 안은 채, 그대로 파르라니 얼어 있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자연은 ‘지금,’ 날 것 그대로 천연한 자신을 지극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청정하고 순정한 웅숭깊은 속내를, 들숨과 날숨의 생동에 실어 미혹으로 곤고한 ‘사람’에게도 은밀히 전해주었다.

자연은 ‘그 때’에 아름답게 피고, ‘그 때’에 아름답게 진다. 자연은 ‘지금’을 철저히 살뿐이다. 지금을 철저히 살았기에 철저히 죽을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자연은 지나간 그 때를 그리워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오지도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지극히 ‘지금’을 살고 온전히 내려놓아 본 자는 말을 잃는다. 따라서 침묵은 달관한 자의 언어다. 말을 잃은 겨울 들머리의 자연은, 그저 아름다운 침묵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다함께 부르는 침묵의 노래, 그 모두는 우주의 시은이다. 하니, 임제 선사 이르시되, 이보시게!

“가는 곳마다 주인이요/ 머무는 곳마다 참되다/ 바로 지금 여기일 뿐/ 다시 무슨 시절을 찾는가.”


박재욱 / 나란타 불교 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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