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인생의 마지막 댄스

2011-11-3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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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의 행복

약 한 달 전, 다른 부서의 책임자를 뽑는 인터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서의 업무가 내가 속한 코리아 데스크와는 동떨어진 터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동안 인사팀이 수 십명의 지원자 중 최종후보 3명을 선정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그 직책의 직속상관 외 경험 있는 다른 부서장 몇을 채용 과정에 참여시킨 것이었습니다.

한국인 채용에는 익숙한 편이지만, 생각, 문화, 일상 언어가 다른 미국인들을 인터뷰 하는 일은 생경했습니다. 게다가 지원자들의 학력, 경력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비리그 출신에 대학원 졸업은 기본이고, 경력도 미 유수 금융기업 부사장, 대학 마케팅학 교수, 마케팅 컨설팅업체 CEO 등이었습니다.

자부심은 있지만 달랑 4년제 대학만 졸업했고 월드비전이 이력의 대부분인 나로서는 좀 미안한 느낌이 들어 망설이는데, 이를 눈치 챈 인사 책임자가 씩 웃으며 “박 부회장, 월드비전에 관한 한 당신이 전문가잖아, 당신이 월드비전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게 꼭 필요한 질문일 거라고 믿어”라고 말합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Really? Ok! Let’s do it.”
드디어 인터뷰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겪는 미국식 인터뷰는 참 흥미로웠습니다. 우선 면접관들이 지원자들에게 하는 자기소개와 본격적 인터뷰가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인 점이 이채로웠습니다. 또 충분히 사전 검토한 양질의 질문, 지원자들에게 충분한 답변시간을 주는 배려 등은 능력과 자질, 경험을 측정하기 위한 빈틈없는 준비가 있었음을 알게 했습니다.

한 명, 두 명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들의 독특한 강점들에 감탄하면서 결정이 쉽지 않을 것임을 절감하는 가운데 마지막 차례가 되었습니다. 인터뷰 룸을 열고 들어오는 지원자를 보면서 면접관 5명의 얼굴에 약간 의아해 하는 빛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예상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고, 안경 속에서 쉴 새 없이 깜빡거리는 눈은 불안한 느낌을 주었으며, 보청기의 선이 귀 너머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청력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 건강 등에 관한 질문은 고용법이 엄금하는 터라 해당 업무에 대한 그의 이해 정도, 경험, 비전 등에 초점을 맞추어 면접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특별함이 그에게서 감지되었습니다. 훌륭한 경험이나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지원 동기를 묻자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저는 경제적 필요나 명예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중대한 인생의 깨달음이 있었고, 그로 인해 내 인생의 마지막 댄스를 후회 없이 출 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월드비전은 그 응답이며, 다행인 점은 월드비전의 빈 자리가 마지막 댄스에 가장 적합한 내 주종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었나. 그의 특별함이’ 라고 생각하는 내 입에서 약간은 퉁명스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하필이면 왜 마지막 댄스지요? 그 댄스를 당신 인생의 정점에서 출 생각은 없었나요?” 20여년 월드비전에서 활동하면서 현장의 치열함을 숱하게 체험한 내게 마지막 댄스란 말이 세월을 낚는듯한 낭만적 표현으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지 압니다. 미리 깨달았었다면 그렇게 했겠지요. 비록 내가 인생의 정점에서 춤 출 기회는 놓쳤지만, 대신 마지막 댄스는 내 인생의 정수를 담아 추는 춤이 될 것임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바로 비장함이었습니다. 그의 특별함은. 긴 세월 체득한 모든 것을 인생의 마지막 춤사위에 담아내겠다는 결연함, 장렬함…. 나의 우려가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이후에도 여러 절차가 남아 있어 누가 발탁되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담아 낼 마지막 댄스’라는 그의 말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긴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추게 될 댄스이기 때문입니다.


박준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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