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과 현실

2011-11-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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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 일상, 깨달음

저는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자기표현을 잘해야 돋보이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단 말을 잘하고 볼 일이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을 너무 잘하다 보면, 행동이 그 말의 뒷감당을 못해서 신뢰감을 잃기도 쉽습니다.

저는 북한 고아 돕기 심부름으로 북한을 드나들면서 북한의 관리들이 정말 말을 잘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라든지 강성대국의 내일을 설명하는 말을 들으면 유창하고 앞뒤가 잘 맞는 언어구사에 놀랍니다. 하지만 북한의 현실은 그들이 말하는 것만큼 잘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지난 5월 초에 저는 평양에 있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우리 미주 재림교우들이 북한의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고아 2,400여명을 거의 두 달에 한 번씩 지원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부터 북한 당국이 갑자기 청진 입국을 허가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입국이 가능한 평양 일원의 고아원이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답사차 갔던 때였습니다. 우리 교우들의 지원으로 옥수수 100톤을 들여가서 평양 당국에 전하고, 고아원 세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는 일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안내원과 관계기관의 책임자들은 먼저 우리 일행을 평양 관광으로 이틀을 소비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평양을 세 번째 갔었기 때문에 평양 시내 관광은 이미 관심이 없었지만 동행한 분이 초행이라서, 그리고 혼자 숙소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같이 다녔습니다. 관광명소마다 안내원들이 있어 설명을 하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이상촌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절절이 옳고, 감동적이고, 눈물 흘릴만한 사연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관광 후에 우리는 고아원 답사를 하도록 허용 받았는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세계의 어느 고아원인들 조금씩 낡고 때 묻은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안내원은 그곳이 참 행복하고 잘 운영되는 곳이라는 설명을 이어 나갔습니다. 어렵고 힘든 현장이 보여도 당연히 그럴만한 이유를 설명해 나가기 때문에 고개가 끄덕여지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평양의 고아원들도 청진의 고아원들 못지않게 개선할 점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중등학생이 있는 고아원 한 곳은 우리가 몇 년 전부터 돕던 곳인데 이 학교의 책임자는 이미 우리가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고 보는 때문인지, 보다 진솔한 태도로 학교의 필요를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놀란 것은 이 학교의 부엌에 가서 준비해 둔 저녁 식품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 식품의 양이 너무 적고 종류가 너무나 간단해서 아무리 묽은 죽을 쑤더라도 학생 460명을 먹일 거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으로 어떻게 원생 전부를 먹을 수 있느냐”고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궁색한 답변을 듣는 게 오히려 고통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평양마저 이렇게 점점 열악한 현실이 되고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북한에 올 때마다 겪고 보는 일인데도 정말이지 어쩌다 내 민족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가슴이 쓰리고 목이 메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돌아오면 또 말 잘하는 우리 동포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북한을 도와 줄 필요가 없다고 역설합니다. 당신네들이 고아들을 돕는다지만 그 도움이 북한의 군대나 먹여주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맙니다. 눈물어린 격려와 더불어 고아 돕는 데 보태라면서 푼푼이 모은 지원금을 보내주시는 분들의 얼굴이 마음속에 떠오르면서…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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