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 자리가 그 자리

2011-11-1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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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속의 부처

애바삐 달아나는 잠시 맡겨진 한 세월을 언제나 으스레한 혼몽 속에 사는 ‘저’들에게, 게슴츠레한 마음의 눈을 화들짝 뜨게 하는 복된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는 예수님의 지엄한 언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역경상의 차이가 있어 자칫, 말씀의 본래 의미가 왜곡될 소지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중, ‘잘못을 뉘우치다’라는 의미의 한자어 ‘회개’로 번역된 ‘메타노이아’라는 헬라어는, 그 어원이 의식(noia)의 전환(meta)을 뜻한다고 한다. 그 의식의 전환을 한 마디로 ‘깨침’이라고 해도 되겠다. 깨침은 진리에 대한 눈뜸이다.

1945년 이집트의 나그함마디 지역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서에는 깨침의 정황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으니라. 둘을 하나로 하고,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대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라.”


젖먹이 갓난아이는 나와 대상을 분별하거나 이분법적 차별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좋다/싫다, 안이다/밖이다, 나다/너다 등과 같이 이분법적인 갈등구조이다.

인간은 너무 양극화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전도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 대립시켜 한 쪽을 배척하고 한 쪽을 선택하게 하는 흑백논리적 선명성을 선호하는 한, 세상의 평화는 없다.

본질적으로 세상의 양면성과 이중성이 보편적인 진리이다. 심기가 막연하고 답답하겠지만, 어쩌랴 그것이 그것인 것을. 쉬운 예로 ‘아내’와 ‘남편’은 독립된 개념은 없고 상대적이며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또한 장자 역시 사람이 땅 위를 걸을 때 필요한 것은 발바닥이 닿는 면적이다. 그러나 발이 닿는 부분만 남기고 그 둘레를 모두 파 내려가 절벽을 만들어 버린다면, 그 발 닿는 곳마저 쓸모가 없어진다는 예를 들어 ‘쓸모 없음의 쓸모 있음’ 즉, 무용지용을 설파한 바 있다.

도마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양극단은 부단히 상호 작용하는 관계로써 조화와 상생을 통해 세상은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그리고 한 극단에 치우쳐 집착하게 되는 그러한 단세포적이며 호전적인 상극의 사유방식을 극복하고, 전체를 조망하는 깨친 마음의 눈을 가지게 되면, 비로소 영적인 갓난아이가 되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 나라인 천국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속에 있으며 의식의 전환으로 예수님과 같은 대자유인이 되면, 이미 세상은 ‘그 나라’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불교는 일찍이 양면성이 사물과 현상의 본자리이며, 상호 의존하는 양 극단의 연기적 통찰에 의한,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며 ‘차이 속의 동거, 동거 속의 차이’인 중도의 진리를 깨치면 곧바로 ‘붓다’라고 하였다. 한 생각 차이로 극과 극은 너무나 멀고 너무나 가까운 것이 된다.

구한말 선종의 기치를 드높인 경허 대선사는 깨어 있으면 그 자리가 바로 그 자리(꽃자리)인 소식을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과 청산 어느 쪽이 옳은가/ 봄볕 드는 곳에 꽃 피지 않은 곳이 없구나.’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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