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월가에서 터진 젊은이들의 함성

2011-10-15 (토)
크게 작게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프랑스 말로 ‘귀족들은 의무를 갖는다(Noblesse oblige)’란 뜻이다. 이 말을 풀면 부와 권력과 명성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 흔히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쓰여 지는 이른바 ‘서민들의 항거’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14세기에 일어났던 프랑스와 영국과의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이 프랑스의 칼레라는 마을을 포위해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군은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대신, 영국군에 항거했다는 책임을 지고 처형당할 대표자를 요구했다. 이 때 시장과 법률고위직 등 6명이 처형당할 것을 자청해 나섰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지금 세계 곳곳에선 없는 사람들, 특히 청년 실업자들의 항거가 날을 더해 심해져가고 있다. 지난 9월17일 미국과 세계의 경제 중심지인 맨하탄 월가에서 시작된 이들의 슬로건은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이다. 30여명의 젊은이들이 월가에 텐트트를 치고 시작된 작은 행동이 이제는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저항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1%에 대항하는 99%의 저항”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항거가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 역할임을 주장하고 있다. 1%란 부와 명성과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99%란 그들의 지배와 영향 하에 있는, 가진 자들의 입김에 따라 낙엽처럼 져버릴 수 있는 못가진 자들을 말한다. 젊은이들에겐 분노가 있다. 그 분노는 미국과 세계의 경제를 추락시킨 월가의 탐욕스런 금융권에 대한 분노, 점점 벌어져만 가고 있는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 사회를 책임져야 할 대 기업들에 대한 기업윤리의 부족과 이들을 감싸고도는 정치권에 대한 분노, 더 심각한 분노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분노 등이다.

미국은 1년에 170여만 명이 대학을 졸업한다. 이들이 직장을 잡기 위한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현재 미국의 16세부터 25세까지의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두 배인 18%에 달한다. 재학생을 뺀 50퍼센트에 가까운 젊은이가 일자리가 없다. 거기에 대학 다닐 때 빌려 쓴 빚은 개인당 평균 2만5천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정부의 혜택을 받는 기업들은 기업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감원을 단행한다. 그러나 경영자들과 고위급 임원들은 고액의 연봉과 보너스로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를 받으며 희희낙락한다. 임원으로 있다 퇴직하는 사람들은 기업에서 들어준 주식 등의 혜택으로 평생 먹고살아도 남을만한 수백, 수천만 달러를 챙기며 퇴직을 한다. 이러니 젊은이들이 안 일어날 수가 있겠는가. 월가에서 시작된 항거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퍼져가고 있는 반면, 특히 한국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힘들어 못 살겠다”며 서민들이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15일, 금융소비자 단체. 18일, 음식점 주인들. 이달 말,영세 자영업자들이 거리를 점령(occupy)하려 한다.

또 3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99% 공동행동준비회의’는 15일 오후 6시부터 서울광장에서 ‘Occupy 서울국제공동행동의 날’을 진행한다. 이 시위는 미국에서 시작된 월가의 금융자본 규탄시위와 맥을 같이한다. 이번 시위는 금융자본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전세 값과 등록금 인하, 청년실업해결, 부자과세 등도 요구할 예정이라 한다. 세계적으로 확산돼 가고 있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는 이젠 남의 일이 아닌 듯싶다. 어쩌면 젊은이뿐만 아니라 가진 자 1%와 못 가진 자 99%의 대결구도로 더 크게 확산될 수도 있다. 곪으면 언젠가는 터진다 했던가. 사유재산이 허용돼 치중된 부와 권력의 민주주의의 허점이 곪아 터지고 있는 상황은 아닌지 모르겠다.

1917년 11월7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1%의 왕정이 무너진 후 소련이 탄생됐다. 못가진 자 99%의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1991년 12월26일 붕괴됐고 러시아연방이 탄생됐다. 다시 1%의 세계가 됐다. 역사의 법칙은 순환의 반복이라 했던가. 2011년 9월17일 월가에서 터진 젊은이들의 목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바라는 전 세계 99%, 없는 자들을 대변하는 함성이 아닐는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