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 희망목록 1호

2011-09-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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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의 행복>

9월에 접어든 지난주 어느 날, 뒤뜰에 나가 기지개를 켜며 호흡을 가다듬는데 한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잠자리였습니다. “아! 가을이구나.”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좇아 뒷산을 달리는 한 아이의 모습이 기억의 창고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매년 잠자리를 볼 때마다 반복되는 이 현상은 내게는 일종의 가을 신고식 같은 것입니다.

예닐곱 살 무렵, 막 목사 안수를 받으신 아버님께서 서울을 떠나 강원도에서 교회개척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정을 돌볼 여유 없이 목회에 몰두하시던 부모님, 아침 일찍 학교에 간 누나들….


막내인 내가 눈을 뜨면 빈 집의 정적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에서 뒹굴거나 마당을 어슬렁거리다가 동네에 나가 친구들과 놀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밥 먹으라는 엄마의 부름에 모두 들어가 덜렁 혼자 남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넘고 도랑 건너 누나들 학교에까지 먼 길을 걸어가서는 창밖을 기웃거리며 누나들 공부하는 것을 보다가 그것도 시들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도 바쁜 계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잠자리들이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누나들보다 먼저 일어나 밥도 먹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서는 하루종일 그 예쁜 잠자리들을 잡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추잠자리, 말잠자리, 실잠자리, 물잠자리, 왕잠자리, 미국 잠자리 등등….

희귀한 잠자리를 발견할 때의 설레임과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마침내 그 놈을 잡았을 때의 느꼈던 그 희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햇살이 따가운 점심 때가 되면 친구들과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포획한 잠자리들을 꼬리에 실을 묶어 나무에 달아 놓고는 어린아이 특유의 기상천외, 황당함 일색인 잠자리 설명회를 개최합니다.

“고추잠자리는 한국의 여자 잠자리인데, 남자 잠자리인 미국 잠자리가 반해서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이사 왔다”거나 “다른 잠자리들을 잡아먹는 왕잠자리는 사마귀가 100년을 살아서 변신한 것이다”라는 둥, 서울서 온 새 친구에 대해 무의식적인 외경심(?)을 갖고 있던 순진한 시골 아이들이 말도 안 되는 나의 소설을 진짜로 믿는 바람에 아버님께서 서울 본 교회로 복귀하실 때까지 나는 그들의 사부로 군림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습니다.

외로웠던 유년기를 아름답게 회상할 수 있는 이유는 잠자리에 얽힌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 방문했던 아프리카 케냐 투르카나 지방에서 잠자리를 만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반가움에 잠자리를 좇는데 문득 시선을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한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힘없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라고 잠자리가 신기하지 않을 것이며, 어린 시절 내가 하던 놀이를 하고 싶지 않을까만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게 전부인 아이였습니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으나 일정상 정리할 겨를도 없이 사업장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 내가 찾았던 투르카나를 포함한 아프라카 동부에 60년만의 최악의 가뭄이 찾아와 1,200만명이 생사의 기로에 처했으며, 소말리아에서만 3만명의 아이들이 굶어죽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듣는 순간, 문득 그 아이의 눈빛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당시 떠올랐던 생각이 형체를 나타냈습니다.

바로 비록 외로웠지만, 아름답게 남아있는 나의 추억이 그 아이의 추억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으로만 남아있는 절망스러운 기억이 아니라, 잠자리를 좇고, 가재를 잡기 위해 도랑을 뒤지던 우리네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그 아이들의 추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올해 가을을 맞는 나의 희망목록 1호입니다.


박 준 서(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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