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다, 그 적멸의 도량

2011-09-11 (일)
크게 작게
주마 비치의 아뜩한 벼랑 끝에서, 한없이 바라본 바다는 한없이 비어 있었다. 텅 비우고 있었다. 다만, 외로움을 달래려는 듯, 바다는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일렁이는 몸짓은 비우고 비운 자의 달관의 춤사위다. 그 춤사위는 진실로 자유 한 자, 저 바다의 ‘함이 없는 함’으로써 자비의 시여며. 일면 씻김굿과 같은 엄숙한 종교적 제의다. 나는 그 앞에서 도리 없이 작아졌지만, 동시에 뭇 존재들의 삶에 대한 무량한 긍정을 조금은 눈치 챈 바 되었다.
오래고 긴 여정에서, 수많은 강들은 눈물겨운 자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염되고 탈진한 몸으로 바다에서 죽는다.
또한 허만하 시인의 시구처럼,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자존적 아집으로 꼬장(?)을 부리던 빗줄기도, 속된 세상사의 객진번뇌와 함께, 끝내는 바다 위에서 ‘수평’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 하고야만다. 그 곤고한 생을 끝내고 바다로 녹아든 그들의 귀향을 그 시인은 ‘적멸의 아름다움’이라 노래했다.
적멸의 불교적 의미는 단순한 물리적 죽음이 아니다. 적멸은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열반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죽음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집과 속진으로 오염된 마음이 수행이라는 용광로를 거쳐 청정성을 회복하고 거듭날 때에야, 비로소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
영원한 적멸의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죽어야한다. 죽지 않기 위해 죽어야한다.
저 광활한 바다는 새로운 생명의 모태이며, 소생을 위한 자비와 은총의 용광로로써 적멸의 도량이다. 태양과 달과 바람, 유·무정들의 대승적 동참 속에서, 바다는 “아프냐, 나도 아프”기에 자비의 몸살을 은밀히 앓는다.
그러나 그 적멸의 도량은 머물되 바람처럼 자유롭다. 움직이되 바위처럼 고요하다. 알을 품은 암탉의 겉모습은 고요하지만, 체온을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두 발은 쉼 없이 알들의 자리를 바꿔준다.
텅 빈 바다도, 적요와 평안 속에서 끊임없이 행갈이를 하며 일렁인다. 파랑의 생성과 소멸, 소멸과 생성의 중단 없는 변주는 새 생명의 동력이며 정화의 에너지가 된다. 때로, 한가롭던 바람은 거칠게 휘몰아쳐 가물가물 잦아드는 파랑에 추동의 에너지를 불어 넣어준다.
또한 밀물과 썰물이 들고나며, 난류와 한류가 교류하면서 바다의 속살까지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변화를 모색한다. 각양각색의 생물과 무생물들도 서로가 의지하고 생명의 호흡을 주고받으며 가없는 정화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거룩하고 신성한 의식을 머문 듯 움직이고 움직인 듯 머물며, 천근의 무게로 느긋하게 치러내는 바다가, 아, 저 바다는 눈부시다.
하마, 이 적멸의 도량을 구박하거나 천대하지 말지니, 바다와의 아름다운 동행을 거부하고 탐욕과 편견, 오만에 눈이 먼, 그 무지에 대한 필연적인 과보와 응징은 가혹할 것이다. 정화와 구원의 도량인 바다가 수십억 년을 거쳐 구축한 창발적 진화의 경이로운 힘과, 조화와 상생의 연기적 세계관은 인류가 습득하고 견지하며 지향해야할 고귀한 가치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 천년을 살아가는 인류의 회심과 희망을 담은 곡진한 불교의 메시지며, 선택의 여지없는 신선하고 창조적인 생명의 패러다임이다. 마지막 기별이다.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