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복지국가(Welfare State)로 가야한다

2011-08-0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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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영(경제팀 차장대우)

갈 수 없는 시대 속의 장소지만 실제 경험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곳이 있다. 19세기초 영국, 산업혁명이 절정이던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이 기자에겐 그런 장소 중의 하나다. 템즈 강변을 따라 솟은 굴뚝들이 시커먼 연기를 끊임없이 내뿜으며 하늘마저 어둡게 하던 그 풍경이다. 중절모에 시가를 문 자본가들, 그들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노동자들 그리고 시궁창이 흐르는 도시 뒷골목에서 구걸을 하는 어린 소년들의 모습이다.

우리에게 이런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이는 누구보다 찰스 디킨스일 것이다.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로 대표되는 숱한 명작들을 통해 자본주의 초기의 풍경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동정을 나타냈다. 그 시대가 ‘근대’로 규정되는 것은 약자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야만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만 지배받지 않을 때 비로소 현대사회이며 이상적인 사회의 지향점은 복지국가라고 믿는다.


가까스로 디폴트 위기를 넘긴 부채협상 과정을 보면서 폴 크루그먼 교수가 “부유층과 보수언론 그리고 티 파티 정치인들은 디킨스가 살던 시대를 미국의 이상향으로 삼는 것 같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은 병원도 못가고 아이들이 굶어주는 상황을 ‘당연한 신의 섭리’라고 믿던 빅토리아 시대 기득권층의 의식이 이들에게서 고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계건 국가건 빛이 많아서 좋을 건 없다. 방만한 재정으로 파산한 유럽 국가들이 울려주는 경종도 있다. 하지만 단 한푼의 세금도 더 못내니까 복지예산을 무조건 줄이라고 요구했던 이들, 경제가 결딴나도 상관없으니 절대 협상하지 말라고 협박했던 이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건 국가재정을 염려하는 건전한 보수주의가 아닌 편협한 이데올로기와 극도의 이기주의뿐이다.

가난한 학생에 대한 무상급식, 병든 사람에게 대한 의료서비스, 노숙자에게 제공되는 쉘터 등의 모든 행위가 그들에게는 ‘반 미국적이고 반 자본주의적인’ 사회 병폐일 뿐이다. 복지라는 개념을 공산주의와 동일시하고 복지국가의 힘이 커질수록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와 재산이 침해당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세력들이다. 그동안 우리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들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이런 보호장치들이 견고해지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번 사태를 통해 절대 앉아서 받아먹을 수 있는 편한 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복지는 여전히 싸워서 쟁취해야 할 대상이고 이를 막는 세력들은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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