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물폭탄과 구두쇠

2011-08-03 (수)
크게 작게
여주영(주필)

‘구두쇠’ 하면 자반고등어가 머리에 떠오른다. 한 지독한 구두쇠가 자반고등어 한 마리를 사서 천장에 매달아놓고 삼시세끼 식구들에게 밥 한 숟가락 뜰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게 했다. 어린 아들이 어쩌다 두 번 쳐다보면 “짜게 먹으면 물을 켠다”며 야단쳤다고 한다.

최근 LA타임스에 미국판 구두쇠 이야기가 소개됐다. 한 사람은 실리콘밸리 소재 소프트웨어 기업의 CEO인 아론 패처(30)이다. 그는 창업한 닷컴회사를 2년만에 1억9,000만달러에 매각한 갑부인데도 원 베드룸 아파트에 살고 있다. 가구래야 낡은 소파와 TV가 전부라고 한다. 중고품인 39년 된 구두를 신고 다니며 15만 마일 뛴 포드 승용차를 몰고 다니다 최근 2만9,000달러짜리 일제 SUV로 바꾸었다. 소프트웨어 업체 CEO인 더스틴 모스코비츠는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로 불리운다. 그러나 그 역시 80만달러짜리 아파트에 살면서 회사에 자전거로 출·퇴근한다고 한다.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도 일제 중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최근 700만 달러짜리 집을 구입하기 전까지는 셋방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거부들로 두 사람 다 자기 재산을 죽기 전에 사회에 전액 환원할 것을 약속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부자’로 불리는 저커버그는 뉴저지주의 한 공립학교에 1억 달러를 기부했다. 한인의 정서와 사회분위기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70-80년대 미국에 이민온 한인들은 돈을 잘 벌었다. 당시는 경기가 어찌나 좋았던지 가게를 하나 열기만 하면 손님이 하루 종일 이어져 돈을 자루에 긁어모았다고 한다. 그렇게 돈을 번 한인들은 대부분 우선 고급 동네에 값비싼 집부터 장만하고 일류가구에다 승용차도 물론 고급으로 굴렸다. 한인들에겐 그것이 부와 신분을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었다.

지난 주 서울 일원이 ‘물폭탄’ 세례를 받았다. 호우 피해는 으레 가난한 달동네 주민들이 겪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최고 갑부 동네인 강남이 물바다로 변하고 산사태 쓰나미가 일어나 수십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호화주택들이 침수되고 벤츠, BMW 등 고급 외제차들이 물에 둥둥 떠다녔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광경을 본 일부 다른 지역 주민들이 은근히 좋아하며 “쌤통이다!” “천벌을 받았다” “부자들에게는 수재의연금이 필요 없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돈 많은 강남 사람들이 평소 어떻게 행동했길래 불행을 당하고도 이처럼 비웃음을 사는 것일까? 이들이 현대판 구두쇠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예전의 구두쇠는 자기와 가족에까지 인색하며 알뜰했는데 요즘의 구두쇠는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이웃엔 거의 몰인정하다. 알뜰한 사람은 대체로 유비무환, 혹은 보다 나은 가치를 위해서 저축한다. 검소한 사람은 삶 자체가 간소하며 필요 이상의 영화나 사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재산의 상당부분을 남들과 나누어서 자기가 쓸 수 있는 몫이 적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도 기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지출이 상대적으로 적어 알뜰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성공 지향적이기 보다는 나눔 지향적이어서 돈벌이 자체보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데 더 치중한다.

그동안 실속보다 겉치레에 치중한 한인들 가운데 요즘 오랜 경기침체에 휘청거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샀던 고급주택들이 줄줄이 차압당하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소형 아파트에 살면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불우이웃이나 자선기관에 거액을 기부하는 미국인 거부들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의 물폭탄 사태가 천재인지, 인재인지를 놓고 논쟁이 뜨겁다. 그러나 그보다는 가진 자들이 기득권자로서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다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잘 이행해 왔는지 여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 이번 물폭탄 사태가 남긴 교훈일 것이다.juyoung@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